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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냄새 흩날리는 노들강’을 아십니까?(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38
조회
395

이광조/ CBS PD



“서울 도심에 웬 수산시장이 있나?” 서울에 온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노량진에 수산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었던 의문이다. 바다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도시에 수산시장이라니.

세월이 한 참 지나 서해에서 한강을 거슬러 마포와 노량진까지 커다란 배들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노량진과 수산시장이 아무런 인연도 없는 건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은 하게 됐지만 지금도 수산시장 주변에 가면 비릿한 생선냄새 외에 바다를 떠올릴만한 건 좀체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말이다. 수산시장 주변으로 널찍한 백사장이 있고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면 어떨까. 바다가 보이진 않는다 해도 한강을 통해 서해의 풍경을 바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갈매기들이라도 날아다닌다면 바다는 서울시민들에게 지금보다는 훨씬 친숙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름이면 노들강변에 수박 냄새가 흩날리던 시절에는 아마 그랬을 것 같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노량진 일대를 비롯해 한강 곳곳에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는데, 여름이면 숱한 사람들이 수박을 들고 그 백사장에 모여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수박도 쪼개 먹고 수영도 즐겼다는데... 그 많던 한강 백사장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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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노들섬 한강 백사장 모습
사진 출처 - 서울시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추운 겨울이나 비가 많이 오는 궂은 날을 빼면 되도록이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환경도 보호하고 묵직한 뱃살도 빼고 일거양득이지만 사실 차들로 가득 찬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봄기운을 느끼자마자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건 8할은 한강 때문이다. 늦은 퇴근 길 안양천에 난 자전거 길을 따라 한강으로 나가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동쪽으로 서쪽으로 자전거를 달린다. 강변을 따라 남북으로 펼쳐진 야경을 감상하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달리는 기분이란... 특히나 무더운 한여름, 더위가 잠시 식는 밤에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할 재주가 없다. 그래서 난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감사하면서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는 반환점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뭐랄까, 늘 내게 쓸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강을 좋아하면 수심이 많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밤에 검은 강물을 봐서 그런 걸까. 화창한 봄날,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웃음과 꽃들이 가득한 강변에서도 강물이 여전히 애잔해 보였던 걸 생각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법 하다.

사람마다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 한강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끼는 건 아무래도 욕구불만인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손도 잡지 못하는 그런 답답함이랄까. 비스듬한 시멘트 제방을 내려가 억지로 강물에 손을 담글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접촉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사랑하는 남녀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잡듯이 사람이 강에 다가서고 강물이 모래사장에 스며들었다 물러나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발을 적시고, 기분이 내키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그런 만남이 내가 생각하는 강과 사람의 만남이다. 하지만 내가 자전거를 타며 바라보는 강은 소리도 촉감도 느낄 수 없는 오직 눈으로만 마주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강과 스킨쉽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늘 욕구불만이다.

이런 욕구불만이 나 뿐일까. 요즘 한강이, 아니 사람이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한강과 교감하는 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명을 품고 길러낸 강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하고만 교감을 할 수 있다니.

몇 해 전 취재차 프랑스에 갔다가 세느 강변에 모래를 퍼 날라 백사장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름이면 그 백사장에 파리 시민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긴다고 한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세느 강변에서 말이다.

한강을 바라보며 느끼는 쓸쓸함과 욕구불만 때문인지 나는 강을 찾아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 동강과 섬진강... 강변을 걷다 백사장이 있으면 물과 백사장이 만나는 지점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강물에 손을 넣는다. 휘적휘적 몇 번 손을 저을 뿐이지만 그 순간 그 느낌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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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강을 인간과 교감하는 강으로 만들기는커녕 전국의 강을 한강처럼 아니 지금의 한강보다 더 인간과 유리된 강으로 만들 수 있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답답하다. 강은 물론 인간도 반쪽이로 만들지는 않을지. 사랑하는 존재를, 그것도 생명이 깃든 존재를 눈으로만 느끼는 건 그 존재를 지배하려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대상은 물론 스스로를 불구로 만들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욕구와 권리를 가로막고 박탈하는 행위다.

제방과 아스팔트로 포위된 강변에는 조망권을 앞세운 고가의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이다. 걔 중에는 그 박제된 강 위에 요트를 띄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관음증에 빠진 사람처럼 아파트 창밖으로 꽁꽁 포박된 강을 바라보고 생명의 강을 멋진 항해를 위한 도로쯤으로 생각하며 흡족해 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런 반쪽이의 모습을 좇아야겠는가.

수박냄새 흩날리는 노들강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