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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얽매이면 미래가 없다? (이유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2 17:46
조회
281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올해의 여성 운동상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시위'를 선정했다. ‘수요시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1992년 1월 8일부터 지금까지 16년간 800회 이상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해 온 시위이다. 수요시위는 한 가지 사안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열리는 세계 최장기 시위로 기네스북에 등재 권유를 받기도 했다.

65세부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해서 81세가 된 한 여성은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책임질 때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진속의 그녀는 아름답고 당당하다.

15세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참혹한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고,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할 끔직한 과거의 기억과 싸우던 여성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의 상처를 드러내고, 16년 동안 수백 번의 시위에 참여하고, 마침내 여성운동가로 설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그 힘이 고통의 경험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개인적인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보편적인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여성은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국민과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여성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여성운동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머리를 흔들면서 과거사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이 바로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처음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할 수 없다”면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형성”하자고 제안했다. 실용을 위해서라면 일제가 저지른 과거의 만행이 어떻든 간에 다 잊어버리고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실용이란 “경제”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다 덮어주겠다는 말에 감동하여 한국 경제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는 의문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미리 주는 경우에는 나중에 받을 것에 대한 약속이라도 받아두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거래관행인데, 대통령의 “실용”적인 외교는 보통 사람들의 방식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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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800번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시위' 모습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자신은 물론 새로 임명한 장관들까지 과거의 위법. 탈법행위로 인해 연일 망신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일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겪은 고통을 하루아침에 잊어버리고 덮어둔 채 무작정 미래로 가자고만 하다니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라는 사람의 역사의식이 이 정도 수준인가 한심한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이 “네가 나냐. 내 인생을 네가 살아주는 것이냐. 내 부모가 와서 '사죄 받지 않겠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 한다"고 반발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회귀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극복할 힘을 얻고 미래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고, 추모하고, 또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분석하는 것이다. 과거를 덮고 잊어버리자는 말은 과거가 부끄러운 자들의 선동에 불과하다.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 기념관에 한번 가 볼 것을 권한다. 그들은 원폭피해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처참하게 파괴된 건물을 그대로 두고, 원폭피해 당시 녹아내린 숟가락, 도시락 통, 까맣게 타버리고 피가 묻은 옷가지, 벽돌까지도 박물관에 진열한 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겪은 피해를 이런 방식으로 기록한다면 수십 개의 박물관을 지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도 다 덮고 가자고 하다니 과연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