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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하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 표현의 자유(이유정 인하대 법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14
조회
186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현직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을 후보로 재지명하기 위해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댈러스 시에서,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제청년당’이라는 좌익집단의 청년들이 국기게양대에 걸린 성조기를 끌어내려 석유를 뿌리고 불태우며 ‘우리는 미국에게 침을 뱉는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청년을 체포하고 구속 기소했다. 이 사건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일반인들이 표현이나 표현성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거나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서 정부가 표현행위를 제약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의 제시를 통해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어야 하며, 이는 미국인들이 성스럽게 느끼는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조차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브레넌 대법관은 성조기가 상징하는 것은 미국 사회의 유연성이지 경직성이 아니고, 성조기의 신성함을 지키는 방법은 성조기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평화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며, ‘토론을 통해 오류와 거짓을 밝혀낼 시간이 있다면 이에 대한 대응방법은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 판결은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훼손마저 표현의 자유로 인정함으로써 성조기가 미국인들에게 상징하는 의미를 더욱 확고히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래 표현의 자유란 지배하는 다수가 아니라 반대하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지배하는 다수는 정책과 법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고, 다수의 목소리는 법에 의해 보호받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법을 위반하고 법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지 여부는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중대한 제한을 가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 최진실씨 자살 사건 이후에 추진되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들과 관련된 기사에 무수하게 달려있는 악성 댓글의 내용은 심각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을 수사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행위와도 같다. 사이버공간의 특성상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수사대상은 특정 정치인이나 지배세력을 비난하는 사이트나 블로그에 집중될 것이고, 이는 결국 인터넷상의 여론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그 뿐만이 아니다. 집회 참가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회에서 복면을 착용하는 행위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집시법 개정안도 추진되고 있다. 도대체 집회 참가자들이 국가기관에게 얼굴을 반드시 보여줄 의무가 있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내 기억으로는 삼엄하던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이런 방식으로 무식하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은 없었다.

토론과 설득이 아니라 무조건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방어하려는 정부와 집권여당의 발상이 한심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고, 한편은 섬뜩하다. 하기야 아이들의 먹거리를 걱정해서 유모차를 끌고 촛불시위에 참가한 젊은 엄마들에게 아동학대죄라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토론과 설득, 민주주의의 가치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