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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내 친구 훈철이(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10
조회
237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1.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서귀포 강정마을에 내 친구 훈철이가 있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교 같은과 동기이다. 물론 나와 나이도 같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녔지만 대학졸업 이후 단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다.

그런 그가, 강정마을에 가면 “어이~ 친구!”하고는 이내 “밥은 먹었나?”하면서 반긴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편에서는 의례나 배려이거니 했다. 안 그러겠는가. 해군기지 문제로 마을 전체가 깨지고 날마다 힘든 일들로 아파하는데, 그래도 어떤 이해관계 없이 찾아와서 함께해주니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했을 거다. 서로 별로 진득한 우정을 나눠본 기억이 내겐 별로 없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했던 연유다.

그런데 이 친구, 내가 강정마을에 갔다가 돌아올 때 마다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다. 언제부터인가는 제주시로 돌아가는 나에게 “다음엔 꼭 술 한잔하자. 꼭 자고 가야돼?”하면서 차까지 따라와 배웅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지난여름 몇 차례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는 도보순례, 무슨 무슨 문화제 행사나 술자리 등을 통해 서로를 공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해군기지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마을을 살리겠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도청 앞 1인 시위에도 나서고, 5박 6일 동안의 강행군으로 이뤄진 제주도 전역 200km 도보순례에도 앞장섰다. 나 같은 시민활동가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마을에 찾아오면, 앞서서 반기고, 마을의 궂은일들에도 늘 빠지지 않는다.

마을 평화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8월 어느 날에 그는 주민들과 어우러지던 한밤의 취흥을 뒤로 하고 몰래 둘이 빠져나올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소주잔 하나 씩 만을 앞에 놓고 질퍼덕 주저앉은 마을회관 마당에서 난 그의 ‘개인’을 접할 수 있었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파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 자신이 처한 고통을 감내하며, 또한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부터 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마을회관 바로 옆이 자기 집인데도, 집에도 가지 않고 회관에서 먹고 자질 않나, 예전에 알던 것 보다 부쩍 말이 없어진 모습 등에서 뭔가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그에게서 직접 듣고, 나는 그가 그나마의 직장도 때려치우고 해군기지 막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어쩌면 그 고통과 방황을 의탁하기 위한 자구책이거나 혹은 치유하는 그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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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의 평화박물관
사진 출처 - 필자


2. 얼마 전, 경희대에서 열리는 사회포럼에 갔었다. 지난 몇 달을 들뜨게 했던 ‘촛불’이 어떻게 평가되고, 어떤 의미로 얘기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촛불’과 관련한 이런 저런 글들을 살펴봤지만, 대체로 정치 민주주의 맥락 차원에서 얘기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촛불을 조명하는 첫 날의 대토론회에서 ‘아고라 논객’이라고 소개된 어느 토론자의 말이 쏙 들어왔다. 그는 지난 5월 시작된 촛불을 사실상 처음부터 주도한 ‘개인’으로 보였는데, 확산을 거듭하며 수십, 수백만의 촛불을 일으킨 그 힘은 바로 ‘개인’들의 의사가 결집되었기 때문임을 알렸다. 그런데 그 개인들의 의사란 매우 다양하고 다른 차원의 것들도 많았을 텐데, 이를 의사의 결집, 이른바 ‘의사결정’으로 이끈 것은 바로 토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그 토론과정을 소화한 사람만을 일컬어 ‘네티즌’이라고 한다고 뼈있는 정의를 내리기도 했는데, 더 의미 있게 다가 온 것은 과연 그것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가능했겠나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여러 인간적 관계로 얽혀 있는 오프라인에서는 이런 개인으로서의 생각 드러내기와 토론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을 말하였다.

나는 한국사회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하지만, 적어도 사회문화적으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즉, 정치경제적으로는 근대화와 탈근대를 경험해 오면서도, 사회적으로는 1차원적 연고주의와 온갖 집단논리가 주도하는 전근대의 작동논리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 즉 자신의 의사를 어떤 집단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합리적 개인’이란 근대화의 당연한 결과여야 함에도 우리사회에 여전히 ‘개인’이란 없다. 누구나 국민 아니면, 도민으로서, 어느 회사에 소속된 과장이나 대리로서, 또는 동창이나 동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문화영역의 담론이나 행위에서 탈근대의 현상과 양상을 소리 높여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이를 생산하는 담지자들의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그들 세계의 전근대적 사회적 관계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우리사회에 ‘합리적 개인’들이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종교적 신념의 경계를 넘었고, 학교의 강요된 종교를 당당히 거부하는 어느 고교생의 이야기나 성소수자들의 이른바 ‘커밍아웃’과 같은 현상들에서 나는 줄곧 우리사회의 희망을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 없다거나,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도를 넘었다거나, 시장경쟁논리의 지배하에 양산되는 비정규직의 피곤한 삶 등 어디를 둘러봐도 암울하기만 한 우리사회의 자화상 면면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합리적 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번 촛불을 암울한 시대 뒤편에서 소수자로서의 삶, 경쟁으로 내몰려 깨어진 일상의 상처, 따뜻한 쉼과 나눔의 표상으로서 가족과 가정의 해체 혹은 유지의 고통, 집단과 ‘틀’이 강요한 억압 따위를 박차고 하나씩 터져 나오던 개인들이 마침내 거대한 집단(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으로 보고 싶다. 사실, 이번 촛불의 기나긴 행진은 비단 광우병 쇠고기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강부자’, ‘고소영’, ‘S라인’ 같은 이 정권의 극에 달한 학벌, 종교, 계급의 집단이기주의가 우리사회의 개인(주체)이고자 하는 국민 혹은 민중들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끈 것은 탈근대의 시대에 전근대적인 방식의 지배구조에 숨 막혀 하며 하나씩 등장하곤 했던 합리적 개인들이 아닌가 싶다.

미국의 한 교수는 어느 잡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 전역에서 풀뿌리 민중으로부터 이중 권력 기관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는 예상치 못하게 유사 혁명 상황 속으로 요동쳤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0년 5월 미국에서, 사백만 명의 학생과 오십만 명의 교수들이 전쟁과 경찰 폭력에 저항하며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다. 비록 이러한 운동 세력들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환은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대 교수, 「5.18 기념재단」 발행 ‘주먹밥’21호

촛불의 와중에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의 투표율과 패배에 나는 매우 실망했었다. 수십, 수백만이 연일 촛불을 들고 모였지만, 그들의 권력은 유지되었고 결과적으로 촛불은 어떤 제도적 힘이나 교체권력에 대한 기약과 상관없는 문화현상일 뿐인가 하는 생각에 무기력해 했었다. 그런데, 이 분명한 ‘문화적 전환’은 적어도 전체주의와 같은 우리사회의 서열과 집단의 작동논리에 큰 균열을 내는 사건일 것이고, 이는 권력유지수단으로서의 집단주의에 대한 획기적인 경종이 될 거라는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중심에 국민이 아닌 ‘개인’이 서 있게 되고, 이 개인들과 소통하지 않는 권력은 힘을 잃고 말 것이라는 훨씬 큰 기대도 얻게 되었다.

3.난 훈철이와 또래이자 교우였지만, 서로 기억조차 없이 살다가 10여년 만에 만나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동창으로서, 혹은 동문회를 통해 만나지 않았다.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으로서 어떤 사건에 대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만나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아무런 이해나 연고관계에 의하지 않는 만남이란 얼마나 될까. ‘보편적 합리주의’ 로 위장된 자본의 논리, ‘글로벌 스탠더드’가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논거로 작동되는 시대에 ‘합리적 개인’이란 그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행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경제주체를 일컫는 경제학의 용어가 될 수 없다. 욕망의 정치, 파괴적 성장, 급속한 소용돌이의 비합리적 사회에서 진짜 합리적 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난 가끔 동창회나 동문 모임, 친족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 게 걱정될 때가 있다. 이런 모임들에서 제몫 다하지 못하는 게 이른바 공동체의 미덕에 역행하는 건 아닌가, 좋은 일 한다고들 하지만 나 좋자고 나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혼란도 겪는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친족이나 동문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나와 함께하는 또 다른 많은 관계들이 나를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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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후보지. 요즘 훈철이의 얼굴 같다.
사진 출처 - 필자


그리고 이내, 혼자 둘러댄다.

“인생, 뭐 있어? 한 번 사는 거, 생각한대로 마음 가는대로 열심히 살자!”

내 친구 훈철이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