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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다케시마’ 너머 한국을 생각하며(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00
조회
178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본이라는 시스템

일본사람은 전반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 한국에 비해 일본 TV 뉴스나 신문은 좀 밋밋하다. 뉴스에도 아래로부터의 ‘요구’보다는 위로부터의 ‘하달’이 더 많이 담겨있으며,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쓴 소리는 한국에 비해 별로 들리지 않는다. 물론 ‘하달’한다고 사회가 금방 바뀌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회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새삼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도, 정치가가 특별히 목청 높이지 않아도, 그저 그렇게 굴러갈만한 사회 시스템이 진작에 갖추어져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편에서 보면 일본 국민은 예나 이제나 정치 순응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특히 후자가 관심의 대상이다.
군사주의 문화와 정치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시대(1192-1336)이래 에도시대(1603-1867)까지 칠백여년 가까이 군사정권을 유지해왔다. 군사정권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창의성보다는 집단적 조화성을 중시한다. 개성도 집단이라는 큰 틀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인정된다. 그런 탓인지 일본인은 오랫동안 자신만 잘 보호해주면 위에서야 무어라 하든,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밖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향을 보여 왔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일본 문화는 그런 맥락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정권도 실세들인 ‘다이묘’나 ‘쇼군’에 의해 바뀌는 것이었지, 백성에 의해 아래로부터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표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사라졌지만, 패전(1945) 때까지 군사적 집단주의 문화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면서 여전히 유지되어왔다. 그런 것이 체질화되어있는 탓일까. 일본은 경제는 선진국이지만, 상대적으로 정치는 선진국이 아니다. 정치 선진국이 개인의 권리와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고 실제로 발휘되면서 움직인다면, 일본은 외적 권리는 보장되지만 그것이 정치 현장에까지 적용되기는 힘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치가와 국민은 항상 겉돈다. 국민은 내심 정치가를 좋아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저 그런 정도에만 머물 뿐, 현실 정치를 바꾸기에는 사이에 놓인 무관심의 골이 깊다.
무언가 억누르고 있는 사람들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에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한국에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사실 그 속담은 일본사회에 더 잘 어울린다. 개인의 자유도 집단의 틀 안에서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당연한 일 같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좀 두드러진다. 정치든 문화든 이런 저런 분위기든,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런 감정은 특별히 표출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감춰져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무언가 깊은 욕망이 안으로 숨어들어 얼굴에까지 무언가 어두운 구석이 엿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부족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표정은 상대적으로 밝지 못하다. 개성을 밖으로 펴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속으로만 파고드는 ‘오타쿠(お宅)’가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드시 오타쿠 부류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자신의 눌린 내적 감정을 표출할 기회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생각을 정치 차원에서 과감하게 표출하는 이들 대다수는 이른바 우익세력이다. 이 우익이 일본 여론의 실질적인 주도 세력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 다수보다 목소리 높은 소수 우익이 일본 정치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일본 우익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다수 소시민은 이러한 소수 우익의 목소리를 의식, 무의식적으로 방조하거나, 결과적으로는 이들 목소리에 그대로 끌려온 역사를 지닌다.
일본의 정치가

전후 일본의 정권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현재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한국과 비슷하게 20% 초반 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20% 정도라면 정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정권은 바뀌지 않는다. 엄청난 잘못만 저지르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된다. 일본인은 스스로 아래로부터 정권을 바꾸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심으로는 변화를 요청할지 몰라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거북해한다. 시스템 중심의 사회는 한편에서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변화를 용납하기 힘든 사회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가는 이것을 잘 안다. 일본 정치가는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을 쥐락펴락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특히 음으로 양으로 우익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익이 오랫동안 여론 조성세력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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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 본 독도
사진 출처 - 한겨레


제국주의와 다케시마

일본 정치인이 툭하면 ‘다케시마’를 들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해도, 일본이 다케시마를 역사적이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영토라고 우길 만한 근거는 한국의 독도 주장에 비해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몇 가지 이유만으로 그것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있거나 그것을 입증하려는 차원이 아니다. 항간에는 독도 심해에 묻혀있는 자원을 탐내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유는 그것보다 복잡해 보인다. 중요한 이유는 다케시마를 일종의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놓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우익 세력을 이용하는 일본 정치인에게 ‘분쟁 지역’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전부터 주장했고 ‘나름대로는’ 그렇게 진행시켜왔던 자신들의 기존 논리를 특정 정권이나 세력이 새삼 바꾸기 힘든 사회가 일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케시마’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해온 기존 주장을 이제 와서 바꿀 정치적 명분이 일본인에게는 없다. 이미 과거를 답습해오고 있는 정치 시스템 속에 녹아있어서, ‘다케시마’가 정말 자신의 영토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고, 또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이 변화 없는 사회라는 것도 이것을 의미하며,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우익세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저류도 큰 변화 없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특징 중에 하나가 계속 분쟁지역을 만들어 언젠가는 자신들의 기존 목적을 위해 충분히 활용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가능한가

언젠가 한 학회 토론 시간에 한 일본인 학자가 서브프라임론 문제 때문에 미국 경제가 정말 어려워지면 어떤 명분을 들고서라도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는데, 그러면 일본도 그 전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섬뜩한 예상이지만, 일본에서 살아보니, 그리고 비교적 관심을 가지고 일본 문화를 공부하다보니, 그것이 그저 헛말이나 공상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다케시마’ 문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한일 간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일본 정치가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끝없이 다케시마를 이용할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늘 그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자극해 정치권에 힘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하고 고개를 숙이며 다니는 일부 일본인의 속 깊은 분노를 폭발하게 만드는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다케시마’는 일본을 한국 위에 군림하게 해주는 나름대로의 ‘정당한’ 구실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일본에 군비 강화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북한이 자의반 타의반 냉각탑을 폭파하고 핵 포기 정책을 보여주기 시작한 이후, 일본 우익은 다른 구실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케시마’가 그 구실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강화된 군비는, 다수 소시민적 평화주의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한국을 향해 작용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섬뜩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장기 비전은 있을까

나는 군사나 경제나 정치 전문가가 전혀 아니다. 그저 문화에 관심이 좀 있을 뿐이다. 물론 문화라는 것 안에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치나 처세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한국에서는 잘 안보이던 이런 상상들이 구체적으로 든다. 그리고 이런 상상이 헛된 공상만은 결코 아니지 싶다. 이런 상상을 구체적으로 할 때 일본은 한국과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면서 끝내는 한국의 정치인도 이런 상상 정도는 하고 살겠지, 그래도 내 수준보다는 낫겠지, 무언가 장기적인 비전과 정책은 갖고 있겠지 하는 푸념조의 자위를 하게 된다. 그것으로 동해 한 복판 독도의 외로움이 달래질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