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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옥을 꿈꾸며(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53
조회
245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



“이 때 국외에 계신 건 축복입니다”
이른바 우상숭배죄로 대학에서 재임용을 거부당한 이후 음으로 양으로 내게 도움을 주셨던 한 신부님께서 동경에 있는 내게 메일을 보내며 하신 말씀이었다. 대선과 총선 과정을 겪으며 허탈하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그걸 안 봐도 되니 복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당한 뉴스거리가 쏟아져 나오던 대선과 총선 당시, 나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공부도 놀기도 강의도 하면서 재임용 탈락 파문으로 소진된 기운을 좀 보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 별 관심 없는 일본이라는 곳에 있다 보니,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소식 외에는, 한국의 요동치는 듯 한 정국이 그다지 입체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지 않았고 상상도 되었지만, 체감의 정도는 달랐다.
확실히 새로운 시대
그러다가, 학교에서 교육부를 피고로 제기한 항소심 참석차 금년 3월경부터는 한 달에 한 번 가량 한국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 참에 가족과 동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5월 이후 이른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결정을 거부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위 문화였다. 일본에만 있었다면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묘미가 느껴졌다. 축제 같은 시위, 중구난방 속의 일사불란, 기성 언론보다 빠른 개인 언론, 모두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모습들이었다. 죄들 ‘조중동’만 보는 줄 알았는데 ‘조중동’을 거부하는 목소리까지 포함하여, 내게 메일을 주신 신부님의 허탈감이 상쇄되고도 남을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우뇌적인 한국
80년대 광주항쟁이나 6월 항쟁은 물론,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2004년 대통령 탄핵과 그 역풍의 에너지가 신선하고 가상하더니, 2007년에는 그 열기가 단번에 쇠귀에 경 읽기처럼 반대로 회귀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더니 2008년에는 순식간에 새 대통령 지지율을 20%대로 끌어내리는 그 변화무쌍한 기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21세기 한국이 확실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국인은 감성이 넘치는 ‘우뇌적’ 기질이 다분하다는 것도 다시 확인되었다. 한국 사람들의 저 뻗치는 에너지를 일본인에게 소개해주고도 싶었다. 그러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은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과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심심한 천국과 즐거운 지옥
5월말 재판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이번에도 허무하게 변론을 끝내고 다시 동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은 비를 뿌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이륙하자마자 비행기는 구름 위로 솟아올랐고, 끝없는 구름바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상의 짓궂은 날씨와는 영 딴판이었다. ‘따뜻한 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폭 안기면 그대로 안아줄 것 같았고, 덤벙덤벙 뛰면 순식간에 이리 저리 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치 천국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은 구름 위 고요함이 아니라, 저 구름 아래 혼돈 속에 있었다. 가끔씩 이상 기류를 만나 허공에서 흔들리는 기내가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는 순간 하늘에서 펼쳐졌던 천국에 대한 상상은 멈췄다. 현실은 흔들리는 비행기였고, 변화무상한 저 구름 아래 세계였다. 역시 내가 두 발 디디고 서야 할 곳은 상상 속의 ‘심심한 천국’이 아니라, 지상의 ‘즐거운 지옥’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은 몰라도 방향 하나는 분명했다. 그저 내가 아는 것 하나, 어떻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텐데 하는 것뿐... 이삼십년 가량 종교 공부를 해오면서 확신하게 된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문제였다. 다양한 종교, 무수한 교리들이 있지만, 결국은 ‘생명’이라는 한 마디로 수렴된다는 것이었다. 종교는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이지, 교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자적 교리를 지켰느냐 어겼느냐가 아니라, 생명을 살렸느냐 죽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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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구름 위로 솟아올랐고, 끝없는 구름바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상의 짓궂은
날씨와는 영 딴판이었다. ‘따뜻한 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종교와 권력과 욕망
그런데 이상하게 종교들이 넘쳐나는데 죽임도 넘쳐난다. 종교의 이름으로 편 가르고 죽이기 일쑤이다. 구원의 교리를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상하게 비구원적 현실은 줄지 않는다. 왜일까. 그 많은 교리라는 것이 실상은 권력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가 다급하고 중요한 곳에 새삼 교리는 필요치 않다. 생명을 직접 살리고 살기 보다는, 그저 저 멀리의 대상처럼 간주하는 힘과 여유 있는 곳에서, 교리는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교리의 특성은 그 내용보다, 그 교리를 낳은 곳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리를 지킨다는 것은 교리를 산출한 힘에 동의하거나 종속되는 것일 때가 많다. 여기서는 교리의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교리를 지탱하는 권력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공간성이 부각된다. 권력 밖에 있는 자는 진리 밖에 있는 자로, 비생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종교의 이름으로, 교리의 이름으로 억압과 죽임을 당연시하는 풍조도 생겨나는 것이다.

죽임과 억압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무한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 무한히 확장하고 싶은 욕망, 그것도 가능하다면 나만... 그것이 교리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분명 교리는 포장이다. 그런데 그렇게 포장되고 나면 내용을 잊어버린다. 포장은 내용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내용과 동일시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이 생명의 존재 방식은 사랑의 원리에 따른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네 것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라는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포장된 교리 자체에 안주하며, 제 소유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둔갑시킨다. 교리와 소유가, 욕망과 종교가 혼동되거나 동일시된다. 재물이 종교로 둔갑한다. 사실 인간은 그 둔갑의 과정을 안다. 알면서도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래야 속 깊은 자신의 욕망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욕망을 타고 적어도 겉으로는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속으로는 알면서도 이른바 ‘뉴타운’으로 속이고 알면서도 ‘뉴타운’에 속는다. 차라리 몰랐다면 깨우치기라도 하겠건만, 알면서도 스스로 속는 실상은 더 고치기 힘든 중병이다. 한국인의 넘치는 우뇌적인 에너지는 과연 알면서도 스스로 속아오고 속여오던 그동안의 실상을 폭로하는 힘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내가 정치를 한다면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나는 때로 정치가 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가령 내가 책임 있는 정치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은 지금보다 가난해 질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가난이 저주라고 배워온 그간의 자기 최면적 둔갑술로 인해 가장 나는 반종교적이고 가장 무능한 정치가로 낙인찍혀 탄핵될 것이다. 아니 애당초 정치의 현장으로 들어설 기회조차 누려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지난 이삼십년간 공부한 바에 따르면, 나는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정치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것이 종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브’한 헛된 공상이겠지만, 그런데도 인류의 종교적 천재들은 한결같이 그 헛된 공상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인 것도 분명하다. 한 때 그런 마음으로 목사가 되었다 보니,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나는 마치 습관처럼 여전히 그런 꿈을 꾼다. 한 낮 꿈으로 끝날 공산이 확실할 터인데도...

그래도 그런 꿈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면, 설령 지금보다 가난해지더라도 그런데서 행복을 찾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정치’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 그저 공상이지만, 아마도 예수가 정치를 했다 해도, 그런 공상적인 정치를 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즐거운 지옥의 미래는
그런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장로가 현직 대통령이다.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그 때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함께 가고 더디 가는 정책을 펼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그 교회에서 더디 가는 정치를 원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 그 반대였다. 아, 이 모순을 어찌 할 것인가. 전 세계가 그리 가려고 애쓰는 마당에 어찌 어느 특정인 탓만을 할 수 있겠는가만, 그래도 늘 아쉽다. 포장과 내용을 혼동하지 말고, 생명이라는 내용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가슴 한 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정치하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하느님 나라’일 테니, 그 때까지 이 ‘모순’은 지속될 것이다. 그런 때가 올 거라는 기대도 사실 별로 없다. 그래도 그 모순이 없는 시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나의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차라리 반예수주의 선언이나 하고 정치를 하면 모를까,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를 이용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종교, 그런 정치는 싫다. 교리를 지킨다며 사람을 죽이는 종교는 싫다. 빨리 간다며 여러 사람 버리고 가는 그런 정치는 싫다. 이 땅의 무수한 교회들, 장로 대통령, 차라리, 정말 차라리 창(모)과 방패(순) 가운데 하나는 포기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선택의 기로 앞에 있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니, 제 숙제도 못하면서 어찌 남에게까지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그런 상상까지 못할 이유도 또 뭐 있겠는가. 구름 위를 날면서 구름 아래 펼쳐지고 있는 즐거운 지옥의 미래를 꿈꾸며, 내 앞 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