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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은 멀리 있지 않다(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05
조회
172

이광조/ CBS PD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탈레반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세계 최대의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다. 1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인류의 문화유산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런 야만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그 복잡한 심사를 속속들이 알 길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추론해 보건데 파괴를 불러온 원동력은 그들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면을 향한 신념이 아니라 권력과 결합돼 외부를 향한 독단적인 신념 말이다.

하지만 어디 탈레반뿐이랴.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에 가장 끔찍한 장면들은 이런 독단적인 신념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십자군전쟁이 그랬고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파시즘과 제국주의, 공산주의가 그랬다. 그리고 잠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유행처럼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세계는 독단적인 신념들의 각축장이 돼 버린 것 같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근본주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슬람 근본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탈레반은 말할 것도 없고 여객기를 이용해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 알카에다의 초현실적인 테러를 목격한 마당에 ‘근본주의=이슬람근본주의’라는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세는 차치하고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개명된’ 기독교에도 이런 어두운 역사가 있다. 실은 우리가 ‘근본주의’라고 옮기는 ‘펀더멘털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19세기 미국 개신교에서 발생한 보수주의 운동, 곧 천년왕국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자구 그대로 해석하고 그 교리의 실천을 주창한 천년왕국 운동은 오늘날까지 미국사회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을 십자군 전쟁에 비유하는 일부 미국 개신교계의 모습이 그 단적인 사례다.

종교 전문가도 아니고 미국 전문가도 아닌 내가 빤 한 밑천을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근본주의 흐름 가운데 두 가지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사회에도 불행을 몰고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두 가지 흐름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와 시장주의다(나머지 하나는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자신의 신념체계 외에 다른 것, 즉 타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인 진리이자 선이며 다른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미신이거나 악마, 무지 또는 탐욕으로 치부된다. 이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과 권력이 결합된다고 생각해 보라. 권력은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결합된 권력은 타인의 육체와 노동뿐만이 아니라 신념체계까지도 조종하고 자신과 일체화시키려고 한다. 타자가 그것을 거부할 땐 응징과 폭력 또는 조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종교 전쟁의 역사를 보라.

하지만 권력이 인간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거나 노예로 부릴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면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하나의 신념체계로 통일된 세계 같은 건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하다. 뿐이랴. 근본주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삶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동질적인 공동체를 꿈꾸는 근본주의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고 폭력을 확대시킨다.

종교 얘기는 접어두고 요즘 유행하는, 아니 권력이 강제하려고 하는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보자.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얘기하면서 장황하게 근본주의를 얘기한 것은 요즘 우리사회의 권력층이 민영화(사유화)의 근거로 내세우는 시장주의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요즘 우리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민영화(사유화) 대상들을 보자. 정부의 말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상수도, 전기, 병원, 공항, 국책은행, 방송사 등등이 민영화(사유화) 대상에 포함된다. 공기업 또는 공공기관의 형태로 운영해왔던 이들 서비스를 선진화하기 위해 민영화(사유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다. 선진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핵심은 결국 주인 없는 회사에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주장에 뒤따르는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인을 찾아주다니? 애초에 주인이 존재했다는 말인가. 물론 몇몇 방송사를 포함해 한 때 주인이 있었던 기관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얘기하는 민영화(사유화) 대상의 대부분은 사회 전체의 필요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조금씩 주머니를 털어 만들고 정부가 국민의 위임을 받아 운영해 온 기관들이다(비록 내기 싫은 세금으로 만들어지고 오만한 권력이 국민의 의사는 무시한 채 제멋대로 운영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기관에 주인을 찾아주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근대적인 제도와 기관들의 뿌리가 일본이고 보면 주인을 찾아주자면 일본인들에게 그 권리를 줘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부는 선진화를 말하고 해당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에 필수적인 공적 서비스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민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가격에 말이다. 백보 양보해서 인류 역사에서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라는 것이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길이라면, 그래서 민영화(사유화)와 경쟁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까짓것 한번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안이한 계산과는 달리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에서도 민영화(사유화)가 실패한 사례는 너무 많다. 의식주와 교육, 보건 등 국민의 기본적인 욕구가 공공성에 입각해 제대로 제공되지 않을 때 사회 양극화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시장주의 개혁의 첨단을 달린 중남미 국가들의 사례를 보라. 납치와 범죄가 산업이 되고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사설경비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하는 것이 선진화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시장주의는 박제화 된 근본주의와 얼마나 다른가. 방만한 공기업들을 통폐합하고 필요하고 가능한 기관들을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민영화(사유화)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공적 영역=비능률, 그리고 민영화(사유화)의 대상이라는 단순 논리 앞에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다. 근본주의, 죽음을 불사하는 숭고한 신념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신념을 뛰어넘어 집단화되고 권력화하면 그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탐욕과 폭력이 자라나기 십상이다. 미국의 역대 정부 가운데 시장주의의 기치를 가장 선명하게 내세운 부시 행정부에서 전쟁과 정경유착이 많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뿐인가. 시장주의의 전도사로 정부개입을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던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서는 경제위기 운운하며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이중적인 태도는 시장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잣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사회는 미국과 얼마나 다른가.

탈레반은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