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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잔인한 권력과 조각난 꿈(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47
조회
175

이광조/ CBS PD



지난 해 11월로 기억됩니다. 제가 나무와 풀, 숲을 공부하는 곳에서 강사님들이 봉하마을에 가신다고 하더군요. 청계산 근처였는지, 현장 수업이 끝나고 모두들 저녁을 먹고 해가 떨어진 뒤에야 강사님들이 봉하마을로 출발했습니다. 서 너 분이 가신 걸로 기억되는데, 모두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었습니다. 현직은 아니지만 대통령을 지내셨던 분을 만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겐 그런 흥분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마을에 숲을 가꾸기 위해 과외선생님으로 초대받은 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마을에 숲을 가꾸는데 정말 관심이 많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매실나무의 생리를 알기 위해 광양 매화마을에도 직접 가셨었다죠. 일주일이 지나고 봉하마을에 다녀온 강사님들의 얘기를 듣고는 더 흐뭇했습니다. 고향을, 숲을 정말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다음에 모두 같이 한번 가서 그 숲을 둘러보자고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봉하마을의 집을 두고 아방궁이라느니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서울의 고급 아파트 여러 채 중 한 채만 처분해도 시골에 그 정도 저택은 마련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자신의 흠을 모르는 그런 비난이 효과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이번에는 ‘공권력’이 제대로 동원돼 수사가 벌어졌습니다. 누구든 의혹이 있으면 수사를 받고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겠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공허한 주장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수뢰의혹이 있어 수사한다는 데에는 나서서 토를 달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해지는 이런 저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이런 저런 혐의들이 검찰 발 기사로 쏟아져 나오고 여론재판이 벌어졌습니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혐의사실이 새 나가는 것이 당혹스럽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죠. 하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증오와 능멸을 담은 저주의 말들이 ‘정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채 온 나라에 날아 다녔습니다. 거기에 피의자의 인권이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왕조시대의 사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도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던 정권이었기에 ‘도덕적인 책임과 법적인 책임은 다르다’는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조차도 과거보다 조금 나아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불법 대선자금 문제 같은 고질병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의 수준이 아직 그 정도라는 걸 알기 때문에 묻어두고 가자는데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은 일방통행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은 떡값이라며 반성하는 기색조차 없이 넘어가는 검찰이 이번에 이렇게 부산을 떤 것도 씁쓸하기만 합니다. 그 명단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은 기소가 돼 있는 상태죠. 그 후안무치에 화가 치밀고 슬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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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돌이켜보면 지난 2002년 겨울 천2백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꿈을 꿨습니다. 그 꿈의 중심에 님이 있었습니다. 그 때 천2백 만 명이 같이 꾼 꿈은 달콤한 꿈, 이기적인 꿈, 대가가 바로 주어지는 그런 꿈이 아니었습니다. 불의와 불행, 몰상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하는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소박한 꿈이었기에 더 깨지기 쉬운 꿈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소박한 꿈이란 우리 내면의 끈적끈적하고 은밀한 욕망과는 애초에 경쟁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천2백 만 개의 꿈, 그 속에 천2백 만 개의 욕망이 스며들었을 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님은 같은 꿈을 품었던 천2백만 명뿐만 아니라 비슷한 수의 다른 꿈들을 함께 품어야했기에 많은 이런저런 논란 속에 더욱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사회의 갈등과 반목이 너무 거칠고 깊었으니까요. 펀드 수익률을 걱정하고 아파트 평수 넓힐 생각에 사로잡힌 채 하루하루를 살면서 진보를 논하고 님을 손가락질하며 모든 짐을 떠넘긴 건 아닌지 부끄러운 생각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재임 시절 이런 저런 논란과 실수, 아쉬움과 한계는 모두가 함께 져야 할 짐이었습니다.

퇴임 후 고향에 정착한 첫 대통령으로 시들어 가는 농촌에 웃음과 활기를 불어넣어 줄 지도자로 오래 오래 국민의 사랑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숲을 가꿔 많은 관광객들이 봉하마을을 찾고 그래서 봉하마을 주민들이 어깨를 우쭐하고 모든 국민이 부러워하는 그런 흐뭇한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유쾌한 풍경은 너무나 짧고 안타깝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7년 전 함께 꿨던 꿈은 이제 조각조각 부서져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비극에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조각난 채로 팽개쳐 뒀던 그 꿈을 님이 다시 일깨워줬기 때문입니다. 공상과 탐욕이 아니라 이 험난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편안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다시 깨어진 꿈의 조각들을 모아 붙여야 할 테니 말입니다. 물론 다음번에는 서로를 좀 더 존중하고 인내하며 결실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겠죠. 우리들 마음속의 욕망들도 조금 더 순화시키기고 말입니다. 정책과 노선이 조금씩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 조각난 꿈들을 다시 모아 붙이는 긴 여정에서 님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정치인이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한 인간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