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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주의자로 전향하고 싶다(안수찬 한겨레21 기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46
조회
33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을 경계로 북쪽이 선산, 남쪽이 칠곡이다. 지금 선산은 구미시에, 칠곡은 대구시에 많이 편입됐다. 대구나 구미는 신흥 도시다. 원래 이 지역의 본향은 칠곡과 선산이다. 이 곳 사람들은 영주·봉화·안동으로 이어지는 경북 동북부와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족보 타령에 익숙한 고을이라 그렇다. ‘돔배기’라고 불리는, 소금으로 간한 상어 고기가 이 동네 제사상에 올라간다. 안동 간고등어의 대당이다. 돔배기 맛이 그립다는 이곳 출신 사람들이 간혹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소금 섞은 모래 같다고 생각했다. 짜고 퍽퍽했다.

칠곡-선산 지역은 이른바 ‘TK’의 본류다. 멀리 갈 것 없이 신현확, 박정희, 김제규, 김윤환, 이수성 등이 모두 이 동네에서 났다. 이들 모두 선산 사람이라는 이도 있고, 천만에 칠곡 사람이지라며 핏대 올리는 이도 있다. 나는 이들이 ‘범 칠곡’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자랐다. 내 본적이 칠곡이다. 할아버지들의 무덤이 금오산 자락에 있다. 아버지는 지금도 금오산에서 나무하던 이야기를 한다. 세상의 본류는 TK이고, 그 배후는 다시 칠곡이던(누군가에겐 선산이던) 시절, 박가네 정희, 김가네 윤환, 신가네 현확, 이가네 수성 등이 출세했던 것처럼 안씨 집안에서도 누군가 칠곡을 빛내어야 마땅하다는 게 금오산 정기 받은 칠곡 타령의 결론이었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온 이후 나는 동향 사람 만나길 피했다. 고등학교 동문회 따위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어쩌다 같은 술자리에 어울려도 가급적 잔을 섞지 않았다. 나는 ‘완전히’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투부터 바꿨다. TK 이야기가 나오면 일부러 열을 올려 돔배기처럼 퍽퍽한 정치적 낙후성을 비판했다. 나에게 서울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프랑스의 파리와 비슷했다. 자유와 저항의 도시였다. 완전히 젖어들어 저 금오산 자락, 박정희의 초가 생가에서 검박한 유품 사이를 거닐며 경건하게 고개 조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모두 잊고 싶었다. 대신 백낙청, 장정일, 유시민 등을 마음으로나마 응원했다. 그들로 말미암아 고향을 말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다.

어찌저찌 하여 기자가 된 뒤, 묘하게도 나는 한국 보수 집단을 담당할 일이 많아졌다. 한나라당을 출입했고, 뉴라이트 단체들을 취재했으며, 보수 인사들도 조금 알게 됐다. 자유의지와 무관한 일이었다. 고향이 TK이면, ‘TK 당’을 출입하는 게 이 바닥의 생리다. 지금 청와대에는 고대 아니면 TK 출신 기자들로 버글거린다. ‘고소영’이 ‘고소영’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다. 간혹 ‘고소영’이라서 그냥 넘어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처음엔 사투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조금 지나자 흥미가 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름의 ‘보수 돋보기’가 생겼다. 출세주의다.

정치인이건 지식인이건 한국 보수 인사들을 움직이는 ‘리비도’는 출세의 욕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긴 한데, 특별히 TK 인사들은 그 욕망의 작동방식이 노골적이면서도 당당하다. 이게 뭐 대단한 발견인 것은 아니다. 출세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셈하면, 그의 다음 행보가 대충 도출되더라는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여기서는 ‘비TK’ 사람들을 뜻한다)은 출세 말고도 권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좋은 평판’까지 고려하는데, 내가 지켜본 TK 보수 인사들은 그런 것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세속의 권력은 세간의 평판까지 다스릴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 무덤 앞에 세워질 비석에 어떤 ‘자리’까지 올라갔는지를 아로 새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배움! 금오산(또는 팔공산, 혹은 소백산) 정기 받아 출세하는 일의 사명감을 돔배기 앞에 두고 체득한 부류였다.

그 돋보기는 처음엔 신기했지만 이내 싫증이 났다. 원내대표 출마하신다고요? 아, 큰 결심 하셨네요. 원내정책은 둘째 치고 고향이…. 아, 칠곡 옆 구미시군요. 어쩜, 정말 정말 원내대표 하고 싶으시겠네요. 대권까진 아니어도 나중에 국회의장 한번 하실 욕심도 있으시겠고. 그럼요. 이번에 떨어져도 일단 TK 대표주자가 되면 시장이나 도지사도 가능하지요. 하하, 그 마음 제가 젠장 맞게 잘 알지요. 이래봬도 박통 생가에도 찾아가던 소싯적이 있답니다. 뭐, 그렇다고 손까지 잡아주실 필요야….

아, 참, 그런데 서민들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으면서 왜 정치는 시작하셨나요, 하고 옆구리 찔러 보는 게 소원이었다. 결국 지루함이었다. 내가 보수주의를 들여다보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출세주의 무한반복의 권태감 때문이었다. 타자배려 결여, 당연히 약자는 타자에 포함되니 약자 배려도 결여. 공동체 의식 결여, 당연히 국가도 공동체니까 국가권익에 대한 의식 결여. 포용력 결여, 붉으죽죽한 것들은 전부 권력 쟁투의 상대니까 당연히 혁신파 포용력도 결여. 사상 결여, 사상이 밥 먹여주지 않고 게다가 권력자원이 될 가능성도 희박하니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하이에크도 들여다볼 생각 자체가 결여…. 이런 따위의 수미일관한 출세주의로 한국 보수집단을 해석하는 일은 절대로 절망스런 일이 아니라(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하품 나오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별종’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족보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주의의 족보 말이다. 공부가 짧아 긴 이야기하면 무식이 탄로 날 것이다. 예전 무심히 봤던 책을 다시 읽다가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발견했다. 그는 19세기 말 영국 보수당 당수였다. 프랑스는 혁신파의 나라고 영국은 보수파의 나라다. 프랑스는 루소의 조국이고, 영국은 버크의 조국이다. 그랬던 영국도 19세기에는 자본주의(당시에는 신흥 산업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였다) 세력에 밀려 보수파가 고전하고 있었다. 그랬던 보수당을 다시 일으킨 게 디즈레일리다.
그는 1872년 ‘수정궁’ (런던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만국박람회용 유리 건물이다) 연설에서 보수당의 주요 목표를 천명했다. 핵심은 인민의 생활조건 고양이었다. 노동조건의 개선 없이 인민의 조건이 개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일을 외면하는 당시 자유당을 맹렬히 비난했다. 노동자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 공장주의 잔혹 행위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보수당의 전통이자 핵심 임무라고 말했다.

뒤이어 일련의 개혁입법을 추진했다.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줬다. 노동조건·공장환경·공중보건·공공교육 등에 걸친 사회개혁입법도 완성했다. 자산가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자선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해 그 책임을 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의 상태가 정치의 중심과제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끈 보수당의 개혁입법은 이후 20세기 영국 복지국가로 이어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불리는 영국 복지 시스템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에 의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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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물론 디즈레일리가 개혁입법을 추진한 것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노동계급의 지지 따윈 필요 없으니 아예 친 자산가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물론 디즈레일리는 인민을 진정으로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국왕과 교회라면서 군주제와 종교제도의 영속성을 지키려 했다. 그래도 나라가 온통 하느님의 것이라고 봉헌만하고, 정작 하느님의 어린 양들이 어찌 지내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자세보다야 훨씬 경건하지 않은가. 물론 디즈레일리는 대영제국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수용했다. 그래도 식민 상태의 경제를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무개념 시장개방보다는 훨씬 현명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디즈레일리는 급진파들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귀족층의 ‘온정주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버크식 보수주의에 적잖게 기대고 있었다. 그래도 데모하는 인민을 때려잡아 없애야 한다고 이를 부득부득 가는 ‘배타주의’보다야 훨씬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보수주의의 전통은 에드먼드 버크가 세웠지만, 디즈레일리야말로 보수주의를 정치 현실에 구현한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린다. 1874년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이후 1906년까지 30년 보수당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물론 노동계급을 비롯한 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바탕이 됐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데, 이런 식의 보수주의 장기 집권이라면 춤을 추며 표를 주고 싶다. 흥미롭게도 디즈레일리가 내걸었던 모토 가운데는 ‘One Nation Tory’라는 게 있다. ‘토리’는 보수당의 별칭이다. 특권층과 노동계층으로 이분화된 나라가 아니라 이들 모두가 하나의 나라에서 공존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한나라당’이 될 것이다.

촛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히스테리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만의 하나, 나에게 주어진 재능이 있어 그걸 어딘가 보탤 일이 있다면, 그건 혁신파가 아니라 혹시 보수파에 대한 것이 되어야 옳지 않을까. 개인의 입신양명 이후에 대해선 전혀 배우고 익힌 바 없는 한국 보수 세력에게 온정적 버크, 인민적 디즈레일리, 애국적 처칠, 공화적 케인즈 같은 보수주의자를 소개하는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 똑똑한 혁신파가 더 많아지는 것보다, 진정한 보수파가 한 사람이라도 생겨나는 게 혹시 더 절실한 일은 아닐까. 이런 수준의 보수주의자들과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과 비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면, 차라리 내가 그냥 보수주의자로 전향하는 게 더 나은 일은 아닐까. 금오산 정기 받은 내 안의 보수주의가 이 봄날, 자꾸 그렇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