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야스퍼스와 책 읽어주는 남자(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42
조회
289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라는 영화가 호평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검색하였더니 어떤 이는 한나(케이트 윈슬렛 분)와 마이클(랄프 파인즈 분)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로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좀 더 큰 차원에서 소통의 문제로 접근하기도 하였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가지고 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어두운 과거사를 정돈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 흥미롭다. 영화는 몇 해 전에 개봉된 독일영화 <쇼피 숄의 마지막 날들>도 떠올려 주었다. 나치에 저항한 숄 남매의 삶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번역 소개되었고, 한국의 청년 학생들에게 저항의 영감을 심어주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어쨌든 문자를 깨치지 못한 한나가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방법―어찌 보면 문맹 콤플렉스로 인해 시대를 회피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나는 지멘스 공장 노동자에서 아우쉬비츠 수용소 감시원으로, 전쟁 후에는 전차 검표원으로 숨어 지냈다. 작중 화자인 마이클은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30대의 한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까닭을 모른 채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까지 한나에게 들려주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법과대학생이 된 마이클은 견학을 간 법정에서 그 사이 종적을 감춘 한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나는 수용소에서 유대인 집단살해 건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영화는 가해 집단의 맨 밑바닥에 놓였던 한나가 시도하는 말걸기라고 할 수 있다. 한나의 세상에 대한 말걸기, 피해자들에 대한 말걸기, 마이클에 대한 말걸기, 나아가 작중 화자인 마이클의 말걸기가 겹치면서 영화에는 작은 반전들이 거듭된다.

법관은 한나에게 수용소 화재시에 간수로서 유대인을 풀어줄 수 없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한나는 판사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를 되묻는다. 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감시원 역할을 사직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후 과거청산에서 자주 등장한 논리였다. 심지어 법정은 사형집행인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형집행인을 사직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전제하에 사형집행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렇다면 원래 사형을 선고한 판사들은 어떤 책임을 져야했을까? 놀랍게도 사악한 판결을 이유로 처벌받았던 나치판사들은 없다. 한나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무수한 죄인들 중에서 '억울하게' 걸려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090407web03.jpg
"법적 책임은 법정에서 추궁할 수 있지만 다른 책임들은 어떻게 추궁할 수 있을까?"
사진은 영화 '더 리더'의 한 장면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발키리>도 나치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독일에도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사람들, 나치의 만행을 최소화시켰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양심적인 인간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골드하겐은 <히틀러의 자발적 집행자: 독일의 보통사람들과 홀로코스트(Hitler's Willing Executioners: Ordinary Germans and the Holocaust, 1996)>라는 책에서 광신적인 나치들뿐만 아니라 독일의 보통사람들도 유대인 말살론에 기꺼이 동조하였다는 점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문제는 다수에게 있다. 세상을 끝장내는 데에는 악인 몇 명으로는 충분치 않고, 다수의 보통사람들의 비겁과 동조가 있어야만 한다. 나치 시대에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나치가 장차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독일인의 책임을 법적, 윤리적, 정치적,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예리하게 구분하여 지적하였던 것이다. 물론 법적 책임은 예상대로 법에 따른 책임을, 윤리적 책임은 양심에 따른 책임을, 정치적 책임은 국민의 일원으로서 지는 집단적인 책임을, 형이상학적 책임은 불행과 야만에 대한 인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담하는 책임을 의미한다. 법적 책임은 법정에서 추궁할 수 있지만 나머지 다른 책임들은 어떻게 추궁할 수 있을까? 인권침해와 집단살해를 저지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그 책임을 이행하는 방법일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학살은 문맹이나 지성의 착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이다. 한나가 감옥에서 문자를 깨치듯이, 윤리적 책임의 문법도 그렇게 단순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