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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인문학 혹은 역사, 그 위험한 거울(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41
조회
184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소위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이 최근 대학 안팎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최고경영진(CEO) 인문학 강좌’가 회사경영과 시장경제에서 차지하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조력의 중요성을 고용주들에게 주지시킴으로써 인문학전공자들의 취업알선(?)을 겨냥한다면, ‘시민인문학 강좌’는 상아탑 바깥에 거주하는 일반인에게 꿈꾸기와 사색하기 등과 같은 인문학적 가치를 일깨워줌으로써 팍팍하고 고단한 그들의 삶을 위무하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유익하고 행복한 세상살이에는 전혀 쓸모없는 ‘음풍농월(吟風弄月)’과 ‘고담준론(高談峻論)’에 탐닉하고 있(다)는 인문학에 쏟아지는 비난을 불식시키고 일반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인문학 대중강좌이다. 그 중에서도 ‘희망의 인문학’은 노숙자나 수용자와 같이 특수한 처지와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삶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력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사회복귀를 안내해 주는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 힘입어, 나는 지난 2월에 수원구치소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학술진흥재단이 후원하고 인권실천시민연대 등이 주관하는 ‘평화인문학’ 강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프랑스혁명의 재발견: 여성과 인권’ 등의 세 이슈에 초점을 맞춰 10명의 미결수들과 함께 공부했다.

강좌의 기본취지는 우리가 이제까지 배웠던 역사지식이 위인과 영웅, 유럽과 남성 등을 중심으로 한 승자들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반성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 동안 억압되었던 집단들(민중과 여성, 사회주변인 등)이 ‘낮은 목소리’로 전해주려는 ‘또 다른 이야기’를 경청해 보자는 것이었다.

승자의 역사학이 그 본질상 정복과 파괴, 침략과 갈등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동반한다면,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역사학은 공존과 배려, 포옹과 용서를 지향함으로써 평화인문학의 성격에도 부합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위와 같은 그럴듯한 수업목표를 표방하면서 진행되었던 ‘수용자를 위한 교정인문학’ 강좌는 내게 몇 가지 심각한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소위 제도권(대학교)에서 ‘역사 선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10여 년 동안 근무하면서 일반인들이 흥미롭게 읽고 양식으로 삼을만한 글을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다는 창피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강의 자료집에 게재될 글을 요청받고서야 나의 학문 활동이 극히 소수의 동업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전문적 연구에 제한되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무도 읽지 않는 하찮은 논문들을 (되도록이면 많이!) 생산하는데 열중하면서 정작 중요한 세상살이에는 무관심한” 한심한 인문학자가 내 자신이었던 것이다. 내 이웃과 사회, 현실과 세계정세에서 격리된 백면서생들이야말로 인문학 위기의 주범이라는 비판에서 나 자신도 비켜갈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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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문학 1기 수료식 모습


다른 한편, 나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궁극적으로 수강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끊임없이 직면해야만 했다. 강의주제와 관련해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지배층들이 독점했던 역사서술의 편향된 시각과 해석―예를 들면, ‘인디언’을 멸종위기로 내 몰았던 프런티어(Frontier, 개척)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최강국으로 발 돋음 한 미국의 서부팽창사와 “나는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자랑했던 19세기 어느 영국 지식인의 유럽중심주의적 발언을 상기해 보자―에 대한 비판은 자칫하면 반미적·반세계화적인(?) 이념교육처럼 들릴 우려가 있다.

마찬가지로, 지배와 통치 및 질서와 발전이라는 승자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되씹어보면 산업혁명이나 자유방임주의가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다른 사람들(노동자와 실직자)의 상처와 고통의 대가였다는 설명은 기존체제를 향한 저항을 부추기는 좌파적(!) 선동으로 오해될 여지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본인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행위를 현재의 시점에서 깊이 반성하여 건전한 미래설계의 발판으로 삼아라. 그것이 죄인인 당신들이 입 닥치고 배워야할 불멸의 역사적 교훈이다.”라는 훈계조의 도덕수업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위험한 의식화교육’과 ‘따분한 정신무장교육’이라는 두 축 사이를 불안하게 왕래했던 나의 강좌는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오늘날 (이 단어에 밑줄 좌~악),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부여안고 수용자들과 함께 했던 총 6시간의 수업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획득했으며 인생관과 역사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자신은 캠퍼스 바깥에서의 교류경험을 통해 역사학의 학문적 정체성과 사회적 책무의 상관성을 고민해 볼 좋은 기회를 가졌다. 흔히 우리는 역사를 과거-현재-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에 비유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법으로 해서 새 것을 만들어 낸다)’ 같은 개념들은 과거의 거울에 오늘의 얼굴을 엄정히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경계하여 새로운 내일을 다짐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존재이유이며 주요기능임을 확인해 준다.

역사서의 제목에 종종 ‘거울’을 뜻하는 ‘감(鑑)’이라는 글자가 붙는―예를 들면, 《자치통감》이나 《동국통감》―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핵심내용은, 이 역사의 거울은 닦으면 닦을수록 위험하여 그것을 자기 입맛대로 과장, 곡해, 요용하려는 사람들을 반드시 처벌한다는 점이다.

‘역사 = 위험한 거울’의 등식은 최소한 두 차원에서 성립된다.

첫째, 역사의 지평이 점점 확장되어 ‘과거의 민주화’가 실행된다면 오랫동안 역사무대에 등장을 거부당했던 개인이나 집단들―청소년과 청년백수, 노숙인과 수용자, 비정규직노동자, 동성애자와 정신병환자, 외국인이주노동자 (무순^^*) 등―이 자신들의 정당한 몫과 권리를 요청할 것이다.

그동안 객관적 진리라고 암기했던 것들이 사실은 권력자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실’에 불과하다고 깨우친 이들은 기득권층에 도전하여 기존의 세계관을 동요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역사학에 대한 한 개인의 지식과 인식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그는 자신을 둘러싼 ‘지금 이곳’의 정치외교적·사회경제적·문화종교적인 모순과 시대 착오성을 예민하게 파악할 능력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역사학은 우리가 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가도록 도와주는 좌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금에 획책되는 반시대적이며 반국민적인 정책과 통치술의 무지와 과오를 포착하여 비판할 수 있는 고감도 안테나와 꺼지지 않는 촛불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혹시, ‘평화’인문학 잔치에 초대되어 ‘다치지 않으려면 조심해! 역사는 위험한 거울이니까’라는 불경한 메시지를 (나에게, 너에게) 발신했다면, 나의 ‘오늘날, 역사학개론’은 본의 아닌 실패작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