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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36
조회
156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터진 입술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입안도 온통 헐어버려 흥건히 피가 고였지만 웬일인지 머릿속만은 또렷하게 후련해져왔다.

지금도 무슨 억하심정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고딩 1학년 2학기말, 교련필기시험에 백지를 내버렸다. 늘 은빛 대위계급장을 양어깨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며 월남에서 용맹하게 베트콩을 때려잡은 무용담을 늘어놓던 구릿빛 얼굴의 교련선생은 시험성적 발표날, 마지막으로 불러 낸 뒤 칠판 앞에 차렷 자세로 세웠다. 그는 약간 살벌하게 보이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명령했다.

“입 꽉 다물어 ! 이빨 나간다 !”

어찌 보면 나는 고딩때 부적응 학생 이었다. 학교가 싫었고, 수업시간에는 뽀얀 몽상에 빠져 들기 일쑤였다. 늘 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숱한 의문들에 휘감겨 있었다. 완력으로 학교에서 짱을 먹을 배짱이나 관심은 없었지만, 언제나 숨 막히게 내리조이는 알지 못할 억압의 실체가 궁금했고 깊은 외로움의 뿌리를 들추어내고 싶었다.

가부장적인 부모님은 내가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 보다 점점 삐딱하게 엇나가는 자식이 걱정거리 일 뿐이고 선생님을 비롯해 주변에서 내면의 동요를 들어주는 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무관심과 비난의 눈초리에 덧없이 삶은 방치되어 가기만 했다.

따뜻한 돌봄과 자상한 관심이 필요했지만 캄캄한 한밤중에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돌부리에 채인 생채기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역설적으로 나는 대학에 가서 ‘의식화 학습’을 하면서 소외와 억압의 뿌리와 실체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서서히 방황을 마치고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 10대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다가도 내 아이만은 이 무모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 할 수 있을 거라는 쓸모없는 욕망으로 무장하는 어울릴 수 없는 두 가지 욕망이 일상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인 듯싶다.

일제고사를 치루는 아이를 ‘거부’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모른 척 눈감아야 하는지 갈등하다 수치스런 이율배반 앞에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어른들의 모습일 것이다.

일제고사로 줄 세우고, ‘자율’학습을 핑계로 밤늦게 까지 잡아두며 여전히 머리나 교복 길이로 쉽게 아이들을 통제 하는 구질구질한 일이 거리낌 없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고딩시절 나처럼 삶에 절망하고 마음속으로 학교를 포기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마, 전국 순위 10% 정도에 들어 ‘대박인생’이 예정된 아이들을 제외하고 지금 자신을 아끼고 미래를 낙관하면서 준비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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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로 대표되어 온 경쟁
중심의 교육정책에 대한 현장의 우려와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 여성신문


촘촘히 서열화 된 사다리를 올라타려고 발버둥치지만 더 높은 사다리를 연결시켜 계급과 신분을 넘어서는 것이 아예 불가능 한데도, 꾸역꾸역 경쟁의 사다리를 올라타는 현실은 아직도 내 아이만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부질없는 신앙이 만들어 낸 속임수다.

아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함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어 무거운 열패감을 털어버리려는 안간힘 일 것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면 고딩 시절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꾸준히 썼던 잡글, 제법 풍부한 독서가 그나마 나를 지탱해준 기둥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신줄’ 잡으려는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고, ‘꽃남’같은 드라마로 아이들의 영혼에 각성제를 놓는 우리가 지금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대리자로, 계급상승을 향한 허망한 ‘기대’를 쟁취하는 전투병으로 만들면서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아이들을 알량한 판타지 드라마로 잡아두려는 교활한 모습으로 어느덧 그 옛날 대항하던 어른들을 닮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거대한 욕망의 구조물을 과연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올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