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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폭력의 전도사들(이광조 CBS PD)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31
조회
150

이광조/ CBS PD



어제, 그러니까 2009년 1월 20일 화요일 아침, 출근길 자유로를 달리던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를 듣고 하마터면 교통사고를 낼 뻔했다. 용산 재개발지역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들이 경찰특공대의 진압에 맞서다 건물에 불이 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잠깐 혼돈을 느끼던 나는 이내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좌절과 무기력함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리고 사건을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다. 가난한 이웃들의 안타까운 비극을 슬퍼하고 마치 전쟁을 벌이듯 강경한 진압작전을 편 경찰을 탓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철거민들의 농성이 ‘도심 테러’라는 비난도 들린다. “도심테러적인 성격이 있었다”(한나라당 장윤석 의원), “이 불법 농성을 생존권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고의적 방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화염병 투척자가 죽었는지 살아났는지도 핵심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안”(한나라당 신지호 의원), “떼만 쓰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심리가 깔려있다... 어떻게 이렇게 폭력시위를 할 수 있는지, 국민으로서 반성을 해야 한다... 불법 과격 시위문화가 이번 사건의 원흉”(한나라당 이은재 의원).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이 쏟아낸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틀 전 출근길에서 2009년 1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이 참사를 내가 왜 그렇게 짧은 시간에 현실로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됐다. ‘그렇지, 내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지.’ 그들이 뱉어낸 말에는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도 엿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도심테러’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의원은 한나라당 ‘용산 철거 참사 진상조사단’ 단장이며, 유족들의 오열이 잦아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의적 방화’ 운운한 의원은 야당의원이 자신을 부를 때 이름만 불렀다고 시비를 벌였다고 한다. 거 참,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판이다.

그나마 서울시에서는 조합 중심의 현행 재개발 사업의 폐해를 인정하고 철거민 생활안정과 법질서 유지를 모두 고려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지극히 밋밋하고 사무적인 입장표명이지만 맞는 말이다. 분명 서울시는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재개발사업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재개발사업이 얼마나 많은 서민들을 보금자리에서 내쫒고 있는지, 원주민 정착율이 얼마나 낮은지, 재개발사업을 통해 투기세력과 건설사들이 어떻게 배를 불렸는지, 공권력이 철거민들에게는 엄격하고 용역깡패들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

그렇다면 서울시가 알고 서울시민이 알고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이런 상식을 한나라당 의원 나리들만 모른다는 말인가. 빈민운동의 대모를 비례대표 1번으로 영입한 정당이 설마 이런 상식적인 일을 모를까.

현실의 허점은 많지만 허점은 점진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70년대부터 근 4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도시재개발 현장의 이런 문제를 바로잡지 않은 건 누구의 책임인가. 서민들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거듭된 배신과 좌절에 누구를 믿고 어떻게 내일을 기다리란 말인가. 겨울에는 철거를 하지 않는다는 오랜 관행도 결국은 이런 현실에서 나온 타협책이었을 것이다. 뿐인가. 철거현장에서 폭력을 휘두른 업체가 제대로 처벌된 게 몇 건이나 있나. 뉴타운 계획도 없는데 선거 승리를 위해 거짓말을 한 정치인들이 처벌되는 거 봤나.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일수를 올려주지 않아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용보험 실업급여를 타지 못한 일은 또 한 두 건인가. 의원나리들이 그렇게 들먹이는 법에는 이렇게 허점이 많다. 뿐인가 서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법을 아예 만들지도 않은 책임 방기는 어디서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한단 말인가. 소통이 단절되고 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사회적 약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집단행동에 의지한다. 경험이 보여주듯 대개의 경우 이런 집단행동은 작은 폭력에 그친다. 하지만 소통을 내팽개친 권력은 거대한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집어삼켜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 무식이든 무관심이든 의도적 무시든 국민 대다수가 아는 현실을 무시하고 약자들에게만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 폭력은 바로 그들의 근엄한 입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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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던 용산 참사 현장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며 지난 해 6월이 떠오르는 건 비약일까. 지난 해 6월 몇 달에 걸친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 끝에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졸속적으로 추진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의 촛불을 보고 시위대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니 노력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자녀의 건강을 걱정해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어머니에게 국회의원이 훈계조로 호통을 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됐고 대통령의 ‘뼈저린 반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광화문 사거리에 흉물스럽게 놓였던 컨테이너 박스는 치워졌지만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장벽이 들어섰을 뿐이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 정비’로 이름을 바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밀어붙이고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학교에서 쫒아내고 ‘입법전쟁’, ‘속도전’ 같은 무시무시한 구호를 앞세워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신과 상처를 심으려는가. 국민과의 소통을 포기한 채 자신의 뜻과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권력 밑에서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그 충성경쟁의 와중에 숱한 폭력이 춤을 추고 있다. 먼 훗날 지금이 폭력의 시대, 야만의 시대로 기록되지 않을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