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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로서의 세계화와 국제교류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30
조회
239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지구촌’이나 ‘세계화’ 같은 상투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외국인과의 만남 혹은 부딪침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도 강의실과 학교식당 등지에서 동아시아에서 온 어학연수자와 한국학을 배우러온 서양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농촌에 시집온 동아시아 여성들과 중소기업에서 기술 연수차 일하는 외국노동자들을 포함하면 ‘지난 5천년동안 지켜온 단일(배달)민족’의 긍지와 배타성은 그야말로 낡고도 옹졸한 신화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직장과 강의실, 지하철과 친척모임 등지에서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면, 내가 배워야 할 바람직한 ‘타자관계’는 무엇일까? 내가 최근에 경험했던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함께 곱씹어보면서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작년 11월말 베트남에서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서의 베트남 여성학자(N)와의 충돌(?)이다. N과 함께 동일분과의 공동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앞 섹션이 예정보다 길어져 급한 마음에 N을 소개도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 순서를 진행했다. 그러자 N은 벌떡 일어나 자기를 무시하는데 대해 항의했고, 실수를 깨달았던 나는 그녀에게 사과하고 발표장의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진행수정을 공지해야만 했다. 한국정부기관이 이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잘난 체하며 주인행세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이로 따져도 나보다 젊었던 N이 정색을 하고 따지는 장면에서 나는 그 전날 호지명기념 박물관에서 보았던 내란시절 호지명의 연설에 환호하던 자립적이며 자존심 강한 베트남 여성들의 얼굴을 발견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나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소위 ‘계약직 외국인 교수(M)’와의 오해(?)사건이다. 평소 교내에서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고 간혹 ‘원어민’의 도움이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문의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의 영어교정에 대한 답례로 나는 대개 점심대접을 해 주곤 했는데, 얼마 전에도 급한 영문서류가 있어 그에게 언제까지 교정해주면 고맙겠다는 요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M은 ‘사전 양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부탁하는데 짜증이 난다.’는 요지의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너는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는 게 섭섭하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가 학교식당에서 혼자 점심/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지나가는 한국식 인사말로) ‘언제 식사나 한 번 하자’고 말하곤 했는데, 그 약속을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었다는 매서운 지적이었다. 당황한 나는 “영어교정과 식사대접을 교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미안하다.”라는 답변을 보내고 바쁜 연말에 만사를 제치고 그와의 식사(대화)자리를 마련했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개인적 일화를 밝히는 까닭은 아마도 누구나 외국인과 관련해서 나와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혹은 근거 없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외국인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우리는 불평하지 않았던가.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한국인처럼 ‘빠릿빠릿하고 근면하지 않다’고 폭언한 적은 없었는가. 또한, ‘우리보다 못사는’―사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도 곰곰이 다시 따져 보아야 한다―동아시아 국가에서 유학 온 대학생들을 예비불법체류노동자로 의심하지는 않았던가. 한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며느리들을 대상으로 ‘김치 잘 만들기 대회’를 열어서 격려하는 것도 좋지만,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그녀 고향마을의 토속음식을 배워서 아내, 며느리의 향수를 달래주는 것은 어떨까. 낯선 외국인·외국문화를 익숙한 우리 기준에 억지로 맞춰 ‘동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배우고 맛보려는 관용과 호기심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 걸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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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뉴시스


필자가 주장하려는 요점은 ‘국제협력이나 국가 간 인력교류와 같은 거창한 차원보다는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외국인과의 이해와 소통이 더 긴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대학생들을 인턴, 유학생, 교환학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유학을 보내더라도 그들이 민족주의적 의무와 자긍심으로 가득 차서 귀국한다면 인류애와 세계평화 향상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다문화(가족)간의 소통에 대한 연구프로젝트가 아무리 학문적으로 중요하다 하더라도 직장동료로 와있는 외국인의 소외와 고민을 경청할 배려가 없다면 그 빛나는 연구결과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외국도시나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어 시장이나 동장이 자매마을을 시찰(관광?)하고 돌아오더라도 그곳에 시집 온 어느 외국인 며느리가 자살하거나 도망간다면 문서상의 혹은 ‘위로부터의’ 국제교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만,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국제교류와 의사소통은 바다를 건너고 비행기를 타고 요란하게 왕래해야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지금 여기’ 내 곁에서 살고 있는 ‘타인’(그가 반드시 외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과의 새로운 만남과 관계 맺기로 결실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