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교육제도의 볼모가 되어버린 사람들(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5:26
조회
187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중학교 3학년 딸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춘천은 ‘비평준화’지역이다. 그래서 인구 26만 규모의 중소도시에서 명문고와 비명문고를 따지며 아이들을 줄 세우고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있다.

춘천도 한때는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 고등학교를 결정 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명문고’ 출신 정책결정권자들의 반란으로 10여년 만에 비평준화로 돌아섰다. 언필칭 시민운동을 한다는 나도, 아이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여느 아버지처럼 오그라들어 평소 주장하던 커다란 가치와 현실이 맞부딪히는 통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뺑뺑이 세대인 나는 운좋겠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렇게 과외금지·보충수업금지·우열반 금지를 내세우는 바람에 고딩 3년을 자유롭게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보냈다. 대학입시도 요즘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내신과 학력고사 딱 두과정만 거쳤다. 그래서인지 요즘 입시방식은 이해하기 어렵기까지 하다.

‘무능한 386’은 어쩌면 이런 단순한 입시구조에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춘천의 기득권층이 고등학교 뺑뺑이를 무력화 시키며 비평준화를 도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 수준과 학벌은 지배층에게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교육제도는 사회 세력 간 역관계의 반영이다. 춘천에서 비평준화가 도입된 뒤 몇 차례에 걸쳐 범시민적으로 평준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교육감 선거 때마다 중요한 선거 공약으로 거론되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대학서열을 고착시키고 사교육비 경쟁에 시민들을 내모는 현실은 교육 받을 권리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면서 실질적으로 신분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081203web04.jpg
0교시 수업과 우열반 편성 등 교육과학기술부의 자율화 추진 계획에 대해 지난 4월17일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의해 전수된 문화자본이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따라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자본의 크기와 위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학교교육을 거부할 배짱은 없고, 다른 방식으로 키우려 해도 조건이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교육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인 나는 요즘 어느새 아이 교육을 핑계로 사교육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대한민국의 지방 중소도시에서 총력을 기울여 사교육에 쏟아 부어도 서울의 강남을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한 질주하는 세상에 점점 뒤떨어져만 간다는 두려움에 시지프스의 쓸모없는 노동처럼, 흉내를 내본다. 이렇게 우리 아이와 나는 어느새 교육제도의 볼모가 되어버렸다.

학교가 개인의 상승을 허용하면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에 봉사하는 중립적인 제도라는 환상은 이미 소싯적에 버렸지만 점점 타락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도록 밀어내는 비루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춘천근교로 귀농한 후배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산촌유학’을 준비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산촌유학’이 한편으로 초등학교 정도에서는 자연과 함께 하는 성장경험이 필요하다는 도시 중산층의 여유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내 생각이 지나친 편견일까? 초등학교 도시유학생을 받아들여야 학교 정원을 지킬 수 있는 현실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춘천의 ‘2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해서 실업계 고교로 발길을 돌리는 아이의, 분노로 축 처진 어깨위에 우리는 무슨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낙오되고, 뒤처진 그 아이들의 좌절된 미래를 향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몰락해가는 지역의 학교와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지금, 눈높이를 더 낮추고 도전하라고 훈계하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