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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난·파’와 연세대의 ‘모드’를 아시나요?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54
조회
478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소위 일류 사립대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고대와 연대에서 최근 ‘성 평등’은 되고, ‘여성주의’는 안 되는, 그래서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모임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탄압이 발생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고대 지리교육과의 여성주의 소모임 <난·파>는 ‘난교파티’의 준말이자 ‘어지러운 물결’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로서 ‘일대일 이성애 중심주의’와 ‘여성들의 섹슈얼리티 발현에 대한 억압’에 저항한다는 여성주의적 함의를 담은 이름이다. 지난해 11월 모임이 결성된 후 같은 과 대학원생의 소모임명 수정요청이 있었고, <난·파>측은 대자보로 거부하였으며, 대학원생은 자신의 페북에 <난·파>의 자보에 반박하는 글을 썼고 이에 비난과 조롱의 댓글들이 달리면서 그 댓글을 <난·파>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 단정됨으로서 <난·파>회원들은 과내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난·파>측은 오히려 댓글을 다는 이들에게 자제를 부탁했다. 집단 괴롭힘은 수시로 오는 카톡과 전화로 번호 바꾸기, 단톡방에서의 언어폭력, 수업시간에 대인기피증으로 울고 있는 <난·파>회원을 비웃기, 맥락 없이 수업 중에 <난·파>사건 언급하기 등이다. 4개월째 장기화되고 있는 학과 내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소모임원들은 우울, 대인기피, 이명, 자살 충동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탄압은 지난 3일, <난·파> 일부 회원들이 지리교육과 졸업 요건 중 하나인 <야외지리조사> 과목 수강이 불허된 것이었다. 그것도 고대 지리교육과 공개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되었다는 점이다. <난·파> 회원들은 현재 양성평등센터에 제소되어 있고 조사위원회가 소집되지 않았고,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로 규정되어 징계를 받은 것이다(고대 여성위원회, 2017. 3. 6.).


<모드>는 연대 정치외교학과 학생회 내에 ‘특별위원회’로서 ‘여성주의위원회’를 지향하는 모임이다. 이 이름 역시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여성참정권운동’을 영화화한, <서프러제트, 2016>의 주인공 이름으로 여성운동의 시작을 의미하고, 하나는 ‘특정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어떠한 상태’라는 의미로, 정치외교학과여성위원회(이하 정여위)(준)가 여성주의 모드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연대 정외과 내에서의 여성주의 담론의 확산과 성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여성주의 모드로 학과 내 여성운동을 시작’하고자 하는 단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정외과 학생총회에서 인준을 거부당한다. 이유는 이들의 방향 및 정책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름’ 때문이었다. “왜 ‘성평등위원회’가 아닌, ‘여성주의위원회’이어야만 합니까?” 이것이 인준거부의 원인으로 ‘여성주의’가 남성배제와 차별을 함의함으로써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으며, 특별위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반대논리였다. 때문에 표결은 인준을 거부하기 위한 부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출석인원에 비해 투표인원이 더 많았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연대 정외과 여성주의위원회(준), 2017.3. 13.).


이 두 사건은 흡사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단체의 ‘이름’, ‘명칭’이 문제가 된 점. 그리고 이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부당한 절차들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이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조직들을 배제하고 탄압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드러나는 점이 그렇다. ‘성평등’ 이라는 말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성적지향을 가진 모든 성적주체로서의 인간의 평등이라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요즘에 와서 ‘폐기처분’될 처지에 있기도 하다. 평등이라는 것은 어떤 기준점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치적 평등은 1인1표라는 형식적 기준점과 모든 국민들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실질적 기준점이 존재한다. 경제적 평등도 마찬가지다. 소위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어떤 한계, 즉 기준점이 존재하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때 ‘복지’라는 시스템을 통해 기준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논리적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성평등도 마찬가지다. 성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 남성?,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등등. ‘양성평등’의 담론에서는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남성’이 기준점이 된다. ‘성평등’에서는 ‘남성’과 ‘이성애’가 권력을 갖고 있음으로 그 둘이 기준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점을 중심으로 차별과 억압받는 다양한 성들이 이 둘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자는 것이 ‘성평등’담론이다. 그렇다면 성평등은 어떻게 생산, 재생산 되고 있는가? 이는 ‘남성’과 ‘이성애’중심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시스템과 관습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토록 주장하고 교육하고 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성불평등’이 재생되게 된다.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남성배제’적인 사상이 아니다. 억압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과정에서, 전 방위적으로 억압이 발현되는 ‘사회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굳어있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남성과 이성애 중심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구조에 균열을 내어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완전히 새로운 사상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모든 구조가 ‘남성주의적’이라는 것에 저항하는 의미로 ‘여성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해왔던 것이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고, 특히 성별이분법으로 고통 받는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도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다.


201612100416_11130923657075_1.jpg사진 출처 - 국민일보


여성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역사적, 사회적 차이로 재생산하는 젠더질서체계를 문제시 하는 것이다. ‘사회역사적으로 구성된 여성과 남성’이라는 프레임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게 기호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엔 ‘의도성’이 개입되어 있으며, 때문에 그 ‘사회역사적 의도성’이 전복되어야 ‘성평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며, 나아가 ‘같아지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 이라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한 날 한 시에 여성과 남성, 이성애와 다른 성애가 똑같아 질 수 있는가? 따라서 성평등이란 애초에 가부장적 질서를 부수지 않는 한에서는 소수의 성에 대한 ‘재량’이자 ‘아량’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난·파>와 <모드>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외과 학생회나 지리학과 학생회는 고민은커녕, ‘성평등’한 관점조차 없이 ‘감히 남성들만의 발화영역’에 도전한 여성들에게 'Mansplain'하는 것으로, ‘재량과 아량의 범위를 초월’하고자 한 여성 집단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서둘러 ‘징계’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긴급히 꺼야 할 불’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들이 왜 그런 단체명을 사용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감히, <난교파티>라니?”, “감히, 남성을 지배하려는 <여성주의>라니?” 정도로 보여 질 뿐이다. 'Mansplain'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man과 explain의 합성어다. 전문가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 여성은 정치를 모른다는 것, 여기에는 성 및 그에 관한 담론은 남성이 주도하여야 한다는 것 역시 포함된다. 여성은 수동적으로 남성의 성을 수용하는 존재여야 하며, 성적 욕망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담론 역시 포함된다. <난·파>는 이러한 현상을 대표하는 사건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이 주도하고 구축한 영역에 그저 얹혀살면 될 뿐 새로운 무엇을 지향하거나 바꿔 보려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 역시 포함된다. <여성주의위원회>사건은 이 연장선에 있다. Homosocial(남성연대)는 남성이 아닌 존재를 대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남성이 아닌 여성과 동성애자남성을 대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대상화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주체에서 대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남성이 아닌 존재를 극렬히 거부하는 것으로서 남성임을 인정받으려는 심리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인 것이다(우에노 치즈코, 2012).


위 두 사건은 ‘남성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여성혐오’라는 구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왜 이 여성들의 의도와 단체명의 의미에 대해 함께 고민하지 않는가? 아니 하려하지 않는가? 왜 ‘이름’이 갖는 의미를 ‘실천’으로 왜곡하는가? 왜 서둘러 권력을 휘둘러 ‘보이지 않게’하려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두려움’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려는, 가부장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으로밖에 볼 수 없다. Homosocial은 Homosexual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성애가 배제된)남성연대가 사실은 성애를 내장한 연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민낯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다. 여성주의와 성 담론은 궁극에는 그 비밀에 도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미래이기 때문에 서둘러 탄압하여 없는 존재, 비가시화된 존재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 이것이 이 두 사건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두 여성단체는 지속적으로 싸워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이고, 그렇게 밖에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고, 사회를 재구성하는 실천은 언제나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군분투에 연대하며, 지지를 보낸다.


이 글은 2017년 3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