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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광화문의 그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1-27 17:54
조회
638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최근 심사가 계속 혼란스럽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전광훈 무리’ 그리고 자유한국당 세력이 거동해 대대적인 광화문 집회를 연 뒤부터다. 솔직히 충격이 컸다. 정권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시위는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60년 4.19 혁명, 79년 부마항쟁, 80년 5월의 봄과 5.18 민주 항쟁,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 혁명 등, 면면히 이어져 온 민주화를 위한 대투쟁은 역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고 또 그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말 그대로 투쟁이었기에 참가자들로서는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반대 성격을 띤, 그러니까 민주화 투쟁의 성과인 민주정권을 오히려 타도하자는 대규모 집회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인가, 이 묘한 광기가 어디에 어떻게 잠복해 있다가 이렇게 분출하는가, 전반적인 성격으로 보아 분명 파시즘적인 대중 동원이 분명한 것 같은데 무조건 그렇게 예단해버릴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도대체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러 물음이 떠오르면서 심지어 불안한 느낌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조국 사태를 기화로 대학가에서조차 이에 편승하는 것 같은 시위들이 생겨났으니 더욱 심사가 복잡했다.


 ‘우리’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인데, 처음 생각대로 결국, 반동적 성격을 띤 대규모 집회 시위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반동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운동이 자신에게 가해질 때 부정적인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반작용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가 문제다. 몇 가지로 추슬러 보았다. 첫째는 촛불 정권이 내세운 ‘적폐 청산’ 작업에 대한 반동이다. 둘째는 정부 주도의 남북평화 기조의 형성에 대한 반동이다. 셋째는 민주화 투쟁과 성취의 전유(專有)에 대한 반동이다. 이 셋이 상호 강화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적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맞물린 것이다. 하나는 권력에 편승한 부정부패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사법기관의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처리다. 그 핵심은 신성해야 할 국가 권력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특정 이익 세력에 의해 근본적일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적폐 청산은 바로 국가 권력을 특정한 세력으로부터 독립시켜 철저하게 보편적인 중립성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벌 기업이나 보수 언론 및 검찰과 법원 등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국가 권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뿌리에서부터 싹을 잘라내겠다는 것이 적폐 청산의 취지다.


 각성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로 세워진 민주정권은 그 정당성에 따른 자신감으로써 적폐 청산이란 ‘엄청난’ 구호를 내걸고 기존의 사회 권력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 기소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이 줄줄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


 그동안 이들이 그렇게 불법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대중의 사회집단 심리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반 대중들 역시 적당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부당한 사회 정치적인 권력에 알게 모르게 편승함으로써 하부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두터운 층을 형성한 것이다. 여러 기업의 고위 임원을 비롯해 저 스스로 사회 엘리트로서 자부하는 사람들, 기존의 사회 형태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종교 권력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속되었던 사람들을 위시해 이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심리적으로 맡길 영웅적인 대리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 등이 이 일반 대중에 속한다. 이들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만으로도 그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과 그 존재의미가 삭제당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들은 반동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핵미사일 공격이니 사드 배치니 하면서 적대적인 분단과 그에 따른 절체절명의 위협이 난무하다가 남북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평화 분위기가 삽시간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이를 현 민주정권의 수장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최대한 확대 심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말한 그동안의 현 상태에 충분히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던 위 일반 대중들은 이 급작스러운 대대적인 분위기 반전에 일종의 아노미 심리 상태에 빠져든 셈이다. 그들은 남북분단과 한반도 내전으로 인해 적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냉전 상태에 맞추어 삶을 이행했고 그런 가운데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의 삶과 존재를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북분단에 따른 모순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적대적인 상태를 체화하여 알게 모르게 그 분단 상태를 즐기고 누려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적폐 청산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사회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저 정권의 수장이 이제 그동안 철천지원수라 여겼던 적의 수장을 이 땅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적진에 올라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듯 한다. 그들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자, 주사파, 공산주의자, 빨갱이, 나라 팔아먹는 놈, 심지어 찢어 죽일 놈 등 그들로서는 최고의 악담이자 저주라고 여기는 욕설들을 마음껏 퍼붓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분통 터지는 심정을 대낮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안심 놓고 분출하여 마음껏 외칠 기회가 주어졌으니 게다가 모이라는 동원령이 떨어졌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그들은 군사독재 국가건 시장 자유주의에 의한 잔인한 자본주의 국가건 저들 스스로 애써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기에 단 한 번도 나서서 나라를 비판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관제 데모를 제외하고는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해 본 적도 없다. 말하자면, 부당한 정권에 맞서서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할 때, 각자가 어떻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위력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확장 심화하는가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민주화 투쟁을 위해 떨쳐 일어서서 ‘산 자여 따르라!’ 하고서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내심 부러워했을 수 있다. 비판적인 힘을 발휘해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감히 분쇄하고자 하는 저 ‘황당한’ 뚝심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하고서 의아해했을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억압받으면서도 순응해 왔기에 순응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저항이니 비판이니 하는 데서 건립되는 삶의 의미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이렇게 살다 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부추기도 독려하고 끌어내고 밀어주는 이상한 동지들이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태극기를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정한 애국자임을 확신할 수 있고, 더불어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드는 것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제국 시민이 된 것 같은 정확한 착각이 일기도 하는 데다, 수시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 정치인들이 함께 행진의 발을 맞추고 나를 향해 위대한 행동을 한다고 찬양하니 어찌 존재가 발양하지 않을 것이며 충동적인 흥분과 광기를 마다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껏 절대적인 성역이라 여겼던 현직 대통령 이름을 마음껏 짓밟아 욕할 수 있으니 이 쾌감이라니.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대통령 이상으로 기세등등한 ‘완장’을 찬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대적인 집단 시위에 참여하게 되자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봉기라 여기게 되고 봉기라 여기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자발적인 동원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에 집단적 충동에 의한 카니발적인 쾌감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마주한 경험이 없는 엄청난 인파를 눈앞에 두게 되니 그들 모두가 나 때문에 흥분하는 것 같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내가 아니면 누가 저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위대한’ 착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연단에 나서서 기염을 토하게 되니, 정치적 인생이란 바로 이 맛이구나 하면서 더없는 환희가 밀려온다. 선전 선동이야말로 정치인의 본령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마약처럼 광장이 그리워진다. 정권 담당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제 무덤을 파는 것 같고, 승리하여 최고 권력을 거머쥘 날이 멀지 않다는 정확한 오인이 자리를 잡는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들 ‘광화문 세력’들은 가상적인 초자아에 길들어 있는 자들이다. 숭배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순응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의 체계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역설적으로 그 금기의 체계를 위반하는 적들이 있어야 한다. 독재가 있어야 하고, 제국이 있어야 하고, 제국 속의 제국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은 영원해야 하고 본질상 완전해야 한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본질적인 가치를 의심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 그 가치가 완전하고 영원하고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반성해서 자각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진실과 정의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들도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자가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대적인 준동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치유 내지는 처리할 방법은 폭력뿐이다. 그들의 자아는 제국 속의 제국이고, 그 제국을 지배하는 원리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파시즘의 물방울들이 모여 제법 큰 잠정적 파시즘의 강물을 형성한 셈이다. 잠정적인 파시즘의 강물이 현실화되어 범람하기 전에 그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의 댐을 건설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원천은 합법적인 폭력이다. 파시즘적인 폭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민주적인 합법적 폭력 즉 민주적인 국가 권력뿐이다. 대내적으로 제대로 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대외적으로 국가 주권이 확고해야 한다. ‘광화문’의 저들이 미국 국기를 흔드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저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이유는 남북 간의 평화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화문 세력’의 등장은 한편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