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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블랙리스트와 사법부의 개혁 (김재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2-07 18:23
조회
824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법원행정처는 사법부의 업무에 필요한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사법권의 독립 하에 둔 독자적인 행정기관으로서, 인사와 회계 등에 있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사법부 내에서 법원행정처가 인사와 재정을 모두 가지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막강한 내부 권력기관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법부 내에는 국제적인 인권문제와 수평적인 사법부의 구조마련 등 대법원의 개혁을 추구하는 자체 학술단체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존재한다.


 지난 2017년 2월경 국제인권법연구회는 법관의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그 작업으로 판사들에게 설문조사를 시작해, 판사들의 인사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와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행동을 법원행정처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당시 처장은 국제인권법 소속의 한 판사를 법원행정처로 인사이동 시키는 한편, 학회의 활동을 중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문건을 받은 해당 판사는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반발했고, 법원행정처는 논란이 확대될 것을 염려해 해당 판사를 다시 일선 법원으로 인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부터 법원 내부에서는 판사들의 뒤를 조사하는 이른바 동향파악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퍼졌고, 드디어 올해 22일에 대법원 추가조사위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을 제시하며,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와대 민정라인이 개입하여 대법원을 압박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시키게 했고 결국 파기환송을 이끌어 냈으며, 이를 위해 담당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등 민감한 내용의 정보 및 의견이 교환된 것으로 해당 문건에서 드러났다. 또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에 법원행정처가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내온 진보적 성향의 판사모임 소속 법관들을 따로 분류해서 이들의 동향 및 성향을 세부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담은 내부 문건들도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2010년에 해체한 우리법연구회와 현재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모임에 참석한 판사들과 그들의 발언 및 논의 내용 등은 물론이고, 해당 판사 각 개인의 가정사와 소셜네트워크 활동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도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권력의 검은 손길이 공정하고 엄정해야 할 사법부를 마리오네트(marionette)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사법의 마리오네트는 수직적 사법행정체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는 뿌리가 깊고 단단한 기수문화와 이에 따른 경직성, 그리고 우월적 지위를 가진 권력기관과 긴밀히 내응하는 출세욕을 가진 판사들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구체적인 한 예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들에 대해 별도의 추천기준을 만들어 리스트화 한 것에서도 그러한 점들은 잘 드러난다. 이것은 소위 왕당파라고 불리는 제어 가능한 판사들만을 위원으로 만들기에 용이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향성과 불공정성 등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진보 성향(인권, 노동, 젠더)의 판사들과 여성 및 장애를 가진 판사들도 분류하고 분석해 추천순위에 형식상 올려놓음으로써 문제가 없어 보이도록 하는 모습도 연출한다.


 사법부는 행정부, 입법부와는 달리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가지고 임명되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사법 권력을 가지며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만큼 더욱더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권력의 집행과 행사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 권력의 행사가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행정부의 부당한 권력과 지시에 따르는 것이라면,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은 훼손되고 망가져서 결국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국민에게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의 사법부의 모습이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길은 사법부 스스로가 개혁하는 길밖에는 없다. 그 출발은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를 타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