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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피의자 신문과정 녹음‧녹화 활성화를 위한 조건 1(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5-20 17:31
조회
1321

이윤/ 경찰관


 93년 흥행에 성공한 ‘투캅스’라는 영화를 보면 ‘취조실’에서 피의자를 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성기 배우가 연기한 조형사는 자해를 했던 피의자를 앞에 놓고 갑자기 타자기에 자신의 머리를 찧어댄다. 이마에 피를 묻힌 채로 ‘아~~ 이자식이 경찰을 때린다!’라고 소리친 후 취조실 벽에 스스로 몸을 부딪치며 계속 ‘으아아~’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구른다. 피의자는 왜 그러시냐며 어쩔 줄 모른다. 결국 조형사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결한다.


 예전에 경찰을 다룬 한국 영화들은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아 현실감이 부족했다. 위 장면의 취조실은 현실 경찰서에는 없는 것이었다. 웃자고 만든 영화를 다큐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타당도가 부족한 장면들은 감상을 위한 몰입을 방해했다. 그 와중에도 실재하지 않는 그 취조실이 나에게는 참으로 부러웠다. ‘우리 경찰서에도 저런 조사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90년대 중반 경찰서에는 조사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없었다. 30명이 넘는 수사관들이 함께 사용하는 널찍한 조사계나 형사계, 또는 5~6명이 사용하는 강력반 사무실에서, 평소 사무용으로 사용하는 책상 앞에 피의자를 앉히고 조사를 했다. 내가 근무한 조사계 사무실은 명절 전날의 재래시장처럼 늘 시끌시끌했고, 베테랑 수사관 분들의 구형 크로바 타자기 소리가 총성처럼 귀를 때리던 곳이었다. 수사관과 조사받는 사람(고소인/피고소인 불문) 간에 난타 공연하듯이 책상을 치며 고성이 오갔다. 큰소리가 아니면 서로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사람이 많은 만큼 꾸리꾸리한 냄새는 코를 괴롭혔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던 94년 여름을 에어컨 없이 선풍기로 버티면서 땀에 젖은 타자기 자판을 두드려야했다.


 고통 받는 나의 오감에 연민을 느끼며 투캅스처럼 타자기를 이용해서라도 그 곳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타자기는 사비로 구입한 전동타자기여서 아깝기도 하고 피도 잘 안날 것 같아서 차마 실행을 못했다. 때로 내 앞에 앉은 간통사건 피의자와 민망한 문답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는 신용카드 대금을 못 갚아서 고소된 젊은 여성이 조사를 받기도 하는 등 피조사자 간 비밀도 유지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이런 환경에서 조사받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쾌적하고, 조용하며, 비밀도 유지되는 조사실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의 기도가 통했는지 2006년 전국 경찰관서에 녹음과 녹화(무려 디지털 방식)가 가능한 ‘진술녹화실’이 설치되었다. 녹화가 가능하므로 수사관이 타자기에 자기 머리를 찧어대면 당연히 나중에 탄로가 나고, 폭행, 폭언, 협박, 회유도 어려우며, 조용하고 차분한 대화 속에 상대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면서 전략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진술녹화실은 피조사자가 거짓으로 수사관에게 맞았다고 하거나, 하지도 않은 욕을 들었다고 생떼 쓰는 것으로부터 수사관을 보호할 수도 있다. 당시에 직접 수사하는 부서에 근무하지 않았던 나는 그런 멋진 조사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수사관들이 부러웠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진술녹화실은 수사관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어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검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좀 이상한 성향인건가? 혼란스러웠다.


 2009년 수사관들에게 왜 진술녹화실 사용을 꺼려하는지 설문조사를 해 보았는데, 세 번째로 많은 응답이 ‘참여인 대동 등 준비절차가 번거롭다’였다.(첫 번째는 ‘수사관의 언행이 부자연스러워진다’였다) 진술녹화실에서도 피의자를 신문할 때에는 담당 수사관 외에 다른 수사관이 참여자로서 입회해야 한다. 수사관들은 각자 자신의 사건을 수사하느라 바쁜데, 자기 사건을 놓아두고 녹화실에 참여하고 있으면 그 시간 동안 고스란히 일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차마 내 사건 피의자 신문하는데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기가 매우 어렵다. 서로 품앗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녹화실 사용 시점에 참여자에게 다른 일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참여자를 구하기 어려우니 진술녹화실 사용을 멀리하게 된다.


 형사소송법은 제243조에서 피의자 신문 시 담당 수사관 외의 사법경찰관리가 반드시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신문 과정에 피의자 진술의 임의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신문하는 장소에 변호인도 아니고 다른 수사관이 참여한다고 해서 임의성이 얼마나 많이 확보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애초 이 조항에서 참여자의 역할은 기록관 내지 수사보조자일 뿐이라는 연구도 있다.


 설혹 이로 인해 임의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녹화장치에 의한 객관적 감시가 다른 수사관의 참여보다는 훨씬 임의성 보장에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진술녹화실 내 피의자 신문에 대해서는 참여규정의 예외를 둠으로써 되도록 많은 수사관으로 하여금 진술녹화실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피의자 인권을 더욱 보장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조서에는 담기지 않는 진술의 뉘앙스와 분위기, 진술의 세부사항, 수사관과 피의자의 태도 및 표정/말투까지도 녹화기기는 온전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진술녹화실 사용이 많을수록 피의자 인권은 더 많이 보호받게 될 것이다.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한 중요한 장치인 진술녹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법상 피의자 신문 시 참여규정을 삭제하거나, 예외규정을 두거나, 참여가 의무로 되어 있는 조항을 ‘참여하게 할 수 있다’는 재량조항으로 변경하는 법률 개정작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