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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의 미 삶(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4-22 10:15
조회
776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고희(古稀)를 보낸 지 어언 10년, 올해가 내 팔순(八旬)의 해다. 세월은 참으로 잘도 간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지나간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짧기만 하다. 유종(有終)의 미(美)가 있는 삶을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자주 반문하곤 한다.


 지나온 삶을 과연 후회 없이 살아왔는가? 자문해 보면 후회도 많은 삶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격동의 시대였기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순간들이 많았다. 어찌 보면 기쁘고 즐거움보다, 질곡의 순간들이 더 많았다.


 허나 한편으로 궤변도 늘어놓았다. 시대와 조상을 잘못 만나서, 아니 운이 없어서라고 해 보았다.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며, 노력도 부족했는데 운 탓이라면, 이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에게도 기회와 변화도 있었다. 결국 노력한 만큼 작은 결실을 얻기도 했었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전후에서, 철부지였던 어린 내가, 맏형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였었다. 그때 각인되었던 아픔이, 성년이 되어서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조국분단과 과도기에 스물두 살의 장형이 죽임을 당했다. 그 후 60년 만에야 진상규명되고 명예도 회복되었다. 참으로 오랜 슬픔에서 기쁨의 순간이었다.


 나는 반백년 전, 가면 죽는다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나도 모른다. 그때 1965년 2월 해외 최초파병은 두려움에 도전이었다. 참전 13개월 동안 생과 사의 기로에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분단국의 평화와 통일을 더욱 갈망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또한 나는 부역자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신원 조회에 좌절했었고, 둘째 형이 의용군과 국군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상이 제대를 했다. 그 후 형은 세 번의 선거로 인해 집안이 기울어져, 내 진학의 꿈도 접어야만 했었다. 허나 ‘배우고 아는 게 힘이다’에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할 뻔도 했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내 삶에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한편 열일곱 살에 청상과부가 되신 양할머니가, 우리 8남매 손 자녀를 마치 산모처럼 척척 받아내고 양육하셨다. 이런 연유로 양할머니는 열녀로, 부모님이 효자효부로, 나는 3남이면서 50년이나 조부모님을 모셔 효열 3대가로 이어졌다. 8남매 중에서 내가 기준과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 집안은 어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끔찍한 생각이었다. 아마 풍비박산 집안이 되었을지도 모를 처지였다.


 이런 사실이 자화자찬으로 비춰질까, 송구한 마음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자성하고 자책하면서 다짐하였다. 과연 남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를 잘해서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까! 또한 과오를 뉘우칠 수 있었을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믿음으로 살아왔던 길이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다.


 첫 번째가 부족한 글쓰기다. 초등학교에서 글짓기에 흥미가 있었고, 성년에도 더욱 정진하면서 만학의 꿈을 이어갔다. 가방끈이 짧다는 자괴감도 있었지만, 열심히 노력해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족하기만 했기에 욕심도 부렸다. 진력하여 여러 권의 책도 펴냈지만, 역시 부족하기만 하다.


 나는 다방면의 글을 쓰고 있다. 다양한 문학의 장르 외에 칼럼도 쓰고, 또한 서예도 연마했다. 여러 작품도 있지만 역시 부족하기만 했다. 글쓰기는 끝없는 퇴고와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데, 게으름과 노력부족으로 미진한 작품을 내고 만다. 그러기에 작품이 완성되면 바로 후회를 하곤 하였다.


 내 평생 나에게 제일 크게 다가왔던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느냐? 하는 무거운 과제였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말로만 노래만 하지 말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실천운동에 적극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보다 큰 노력과 실행들이 부족하기만 했다.


 그간 실천을 위해 평화통일에 다가가는 여러 단체의 일원이 되고, 간부가 되기도 했다. 분단의 현실, 여기에는 일제에 36년을 지배당하고도 진정 해방이 아닌 분단이, 외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에 우리 8천만 동포들이 분단을 외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32세 안중근 의사와 24세 윤봉길 의사가 처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정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윤 의사는 나의 집안 윤문의 형제항렬이기도 하다. 8․15 광복이 분단으로 이어져, 75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분단국, 언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룰지 난망하기만 하다. 허나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을 이겨내야 하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소원인 평화통일조국을 기필코 이뤄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일보다 절박하다. 나는 그간 통일교육위원으로, 평화연대의 회원간부로, 평화만들기, 희망연대, 통준사의 공동대표로 매진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다. 아무리 통일을 원하지 않는 동포나 주변 외세가 존재한다 해도, 이를 극복해 내야만 하지 않을까.


 지구상에 너무도 오랜 분단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존경하는 안중근 윤봉길 두 의사와 선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다짐한다. 사실 오래전 나는 최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남루한 후회를 했었다. 분단 조국의 통일도 이루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 통일을 방해하는 용병군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없는 자괴감을 갖게 되었다.


 그 베트남 인민들은 17도선을 평정하여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을 이겨내고, 당당히 남북베트남 통일을 이뤄냈었다. 진실로 베트남 통일을 부러워하고, 우리가 용병으로 참전해 지은 잘못을 다시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베트남은 이미 남북이 통일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당당히 이겨낸,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어, 한편으로 부럽기만 하다.


 나는 통일된 베트남을 몇 차례 다녀오면서, 그들에게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지나간 원한을 모두 용서한다고 했다. 그들은 당당히 외세인 강대국을 물리치고 세계 만방에 통일된 나라로 발전에 진력하고 자부심도 강했다. 나는 과거 용병으로 참전해 그들에게 아픔과 슬픔을 안겨준 사실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였다. 그들은 지난 우리의 잘못을 용서를 하고 수교도 이루어졌다.



사진 출처 - tvn "디어마이프렌즈"


 필자는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면서, 지난 파란만장한 삶을 돌아보았다. 내 스스로는 지난 삶을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허나 부족하고 미진한 일들도 많기만 하다. 그러기에 언제나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면서 살아왔다. 비록 나이는 들어가지만,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행하고 스스로 반성을 하곤 한다.


 나는 먼저 가신 안중근, 윤봉길 의사(義士)들처럼 비록 젊지 않은 팔순의 나이에 들었지만, 두 분의 삶을 본받아 살아왔고, 살아가려 다짐해 본다. 앞으로 생애를 ‘마무리 잘하는 삶’으로 정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길을 가고자 더욱 진력하련다.


 그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왔는가? 자문하며 그간 나와 맺은 아름다운 인연에 감사한다.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우리 8천만 동포들의 꿈이요, 소원이다.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자 재삼 다짐해 본다.


*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회원. 한국문인협회원. 산영수필문학회장. 서예초대작가.
소설집(못다 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고희기념문집” ‘희수 유감’ 등 다수
산영수필문학회 회장역임 근묵회, 구암서문예원장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