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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 공생하는 시대를 산다는 것(권용선)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2-26 17:20
조회
683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이름을 붙이고, 특정한 병원균에 대한 백신을 만들고, 예방과 치료를 위한 지식을 전파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제너와 파스퇴르의 이름에 사람들이 주목하기 전까지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 대체로 속수무책이었다.


 전염병은 인간의 일상적 활동과 권력의 배치, 전쟁의 승패와 경제구조의 변화에도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로마제국의 몰락에는 말라리아가 개입했고, 중세의 암울함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실패의 배후에는 페스트가 있었다. 19세기 들어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콜레라는 20세기 들어서도 완전히 장악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 동안 위생과 공중보건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고, 도로를 포장하고 하수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과학의 힘은 바이러스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빠르게 그것의 정체를 밝히고, 치료법을 축적해왔으며, 인간의 신체 역시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면역체계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의학은 변종과 진화의 방식으로 여전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병원체와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생명 자체를 연장하는 데 기여해왔지만, 바이러스의 전염과 확산의 속도에 의도치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시대의 바이러스는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프리패스하거나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대도시의 교회, 병원, 식당, 장례식장, 유흥가 주위를 배회한다. 누구도 그것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비가시성의 존재라는 이유로, 그것을 완벽하게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이러스와 그것의 숙주로 지명된 자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최신의 의학 정보와 위생준칙으로부터 소외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가장 먼저 빠르게 바이러스의, 바이러스의 감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그리고 국경을 넘어온 이방인들과 가난한 사람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되거나 고통 받는다. 자주, 바이러스의 이동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포와 불안과 혐오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교란하고 해체시킨다. 바이러스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숙주의 생명을 치명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대신, 빠른 속도로 무자비하게 이 모든 일을 해나간다.


 바이러스는 개별 인간의 신체적인 항상성을 깨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법률과 의료적 체계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관계까지 뒤흔든다. 그것은 변이하고 진화하는 방식으로 매번 다시 되돌아온다. 바이러스는 멈추는 법을 모른다. 인류의 위기는 어쩌면 핵전쟁이나 온난화보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지치지 않고 찾아오는 바이러스의 효과, 그것이 촉발하는 사건들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지금 바이러스와 공생하는 중이다.



사진 출처 - SBS


 코로나19가 예상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지속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다.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혐오의 타깃을 찾거나 심리적 위축이 극대화되면서 과도한 보신의 태도를 취한다. 자가 격리가 요구되는 상황이 아님에도 자발적으로 외출을 삼가고 사회적 활동을 정지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감염의 매체로 의심한다. 바이러스의 활동양상은 독감보다 덜 치명적이고 확장성도 떨어지지만, 그것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일상의 비일상화를 수락하고 감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의 위축이 생명의 위축에 다름 아니라면, 병에 걸리기 전에 이미 의사환자의 역할 속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이러스의 창궐이 만들어낸 일종의 예외상태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환경이 더 이상 예외적인 것으로 마감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감한다. 코로나19는 코로나22, 코로나26, 코로나32의 형태로 조금씩 변이, 진화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와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고 자리 잡게 되리라는 걸. 바이러스는 숙주를 절멸시키지도, 스스로가 절멸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우리와 공생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어두운 디스토피아적 전망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시민사회의 풍경은 생각보다 다채롭다. 마스크를 매점매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사재를 털어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선물하는 누군가도 있고, 공익의 관점에서 바이러스 상황 앱을 만들어 공유하는 누군가도 있으며, 음식이 되지 못한 식재료를 앞에 두고 고심하는 상인들과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을 자청하는 누군가도 있고, 사명감 속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방역의 체계를 세우고 실행하는 누군가들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불편함을 딛고 더 많은 지혜를 모으고 상상하고 실천하고 연대하는 활동들 속에서만 미생물의 진화와는 다른 인간의 진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