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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법의 ‘효과’이다(권용선)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2-18 14:24
조회
588

- 지극히 ‘사적인’ 강사법 단상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대학에서 시강강의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이십년 되었다. 외국에 나가 있던 몇 해를 제외하면, 거의 한학기도 거르지 않고 대학에서 무엇인가 가르치는 일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2010년 조선대에서 근무하던 고 서정민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시간강사의 열악한 현실이 공론화되었고, 문제의식을 가진 소수의 강사들이 나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2018년 8월부터 고등교육법이 개정 시행되었다.


 일명 강사법이라 알려진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법적지위와 처우 등을 개선하기 위해 오랜 진통 끝에 만들어지고 현실화된 것이지만, 그것을 실감하는 현직 강사들의 온도차는 제법 큰 것 같다. 2018년 법안의 국회통과 전후로 우리에게 알려진 법안의 핵심 내용은 강사의 법적지위 부여, 1년 이상 최대 3년까지 근무보장, 4대 보험 가입, 그리고 방중 임금과 퇴직금 보장 등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교육부가 이것을 안정적으로 시행할 만한 예산 확보에 실패하고, 강의인력 및 강좌축소라는 방식으로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대학 측의 공격적 방어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겨울, 그러니까 강사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 이미 대학들은 충분히, 이러한 일들을 진행했고, ‘강사공채’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그 결과 대략 7,800 여명의 강사가 실직했고 많은 수의 강좌가 축소 ․ 통폐합 되었는데, 그중 소규모 강좌 6,000 여 개가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부가 대학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안에 대한 경고와 권고밖엔 없었고, 법안 구축에 개입했던 노조집행부의 활동은 반복적으로 대학의 악마성을 고발하거나 강사법의 훌륭함을 선전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장 강사들 다수는 강사법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고, 강사법으로 자신들의 삶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2019년 5월, 기존에 알려졌던 강사법의 핵심내용은 교육부, 대학, 노조 3주체로 구성된 TF팀 테이블에서 수정과 합의를 거쳐 <강사제도 운영 매뉴얼 시안>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이것에 따르면, 강사의 시회적 지위와 법적 신분을 보장했지만, “「교육공무원법」, 「사립학교법」 및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을 적용할 때에는 교원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방학 중 임금지급을 명시했지만, “임금수준이나 산정방법 등 구체적 사항은 강의 및 수행 업무 등을 고려하여 개별 대학의 임용계약으로 정하도록”해서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내가 출강하고 있는 대학의 경우, 방중 임금은 ‘2주치’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또 매뉴얼에는 “퇴직금은 현행 근로관계 법령에 의거하여 1주간의 소정 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경우에 대하여는 지급 의무사항이 아님” 국민건강보험은 “1개월 동안의 소정 근로시간이 60시간 미만인 단시간근로자는 건강보험의 직장가입자가 될 수 없어 강사는 적용되지 않음”이라고 되어 있다. ‘한 명의 강사가 한 대학에서 주당 6시간 이하의 강의만 할 수 있다’는 강사법에 따라 애초에 건강보험 혜택은 불가능했고, 퇴직금의 경우에도 대학 측의 호의에 기대는 것 말고는 어떤 법적인 권리행사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름답고 완벽한 강사법의 실제 내용이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언론 보도는 극히 드물었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은 이 과정에서 적게는 7,000여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의 강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강좌의 축소 통폐합으로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의 결과가 대학교육의 전면적인 황폐화와 연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만으로 보자면, 강사법은 누구의 행복도 보장하지 못한다. 지난여름 전국의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강사공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블랙 코미디였다. 특정인의 독점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한 학교 6시간 제한 시수’로 인해 적어도 두 세 학교 강의를 해야 기초생활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전업강사들 다수는 닥치는 대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많은 대학들이 연구업적, 강의경력, 면접 등에서 전임교수 선발에 준하는 요구들을 내놓았고, 그 과정은 응시자들의 피로, 자존감 하락, 마음의 상처를 대가로 요구했다. 법적인 연구와 강의 경력은 석사학위 소유자 정도, 특정한 분야의 경우 예외조항도 둔 터였지만, 강박적으로 내외부에서 작동되는 ‘시선의 검열’은 ‘정량평가’를 공정함의 최우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대학들은 대체로 전임자들을 선택하기도 했는데, 이미 검증되고 익숙한 강사를 제외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모험을 대학은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경험도 연고도 없는 대학과 관계를 맺으려면 탁월한 경력과 업적이 있거나 아주 운이 좋아야만 했다. 어떤 대학들은 겸임 혹은 초빙의 형태로 강사들을 유인하기도 했다. 비용은 줄이고 대학평가점수는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SBS


 사실, 강사법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학이다. 재정상의 부담과 학령인구의 감소 등을 이유로 최대한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며 안정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시대의 대학은 더 이상 선량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적어도 사학들은 예전부터 기업의 돈세탁과 감세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어 왔고, 지금은 대학 자체가 사업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등록금 동결 10년, 학령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학내 구성원들을 지속적으로 감축하는 동안에도 대학들은 외국인 학생들을 착실히 유치해왔고, 정원 외 외국인 학생들은 대학재정의 핵심적인 불로소득이 되어주었다. 자본가의 마인드로 무장한 대학은 비용 절감과 이윤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할 것이다. 자본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악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학의 행태를 규탄하고 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자기위안이나 책임회피의 태도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애초에 법안이 시행되기 전 다수의 현장 강사들, 대학 내부의 일부 관계자들, 교육관련 전문가들과 소수의 노조활동 유경험자들은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했고, 법안의 보완을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10여 년 간의 힘겨운 싸움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독한 ‘강사공채’의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쨌든 약간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비록 1년 혹은 최대 3년짜리 비정규직 교원의 신분이지만 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오피스365’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쓸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매년 혹은 3년에 한 번씩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시간과 노력과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후배 강사와 하나의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 교수 신분으로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후배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들은 다시 떠올려도 불편하고 괴롭다. 언제까지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좋은 내용으로 학생들을 만나는 괜찮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 한 무형문화재급 인사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20여 년 동안 출강하던 대학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생활의 문제, 자존감의 문제로 시름이 깊었다고 한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강사법에 흠집이 날까 두려웠는지 즉각적으로 이것은 강사법 때문이 아니며, 비정규직의 문제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맞다. 강사법이 무슨 죄가 있나. 죄가 있다면, 이 강사법의 효과, 법을 효과적으로 자기성장의 기회로 삼는 대학의 무자비한 활동에 있고, 스스로 자긍심을 잃고 번민하며 노조 활동도 안 하는 주제에 볼멘소리나 하는 나 같은 철없는 일부 강사들의 태도에 있고, 예산도 확보 못한 채 대학의 자율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교육부의 무능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선의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개인의 진정성을 공적 정의와 등가적인 위치에 올려놓으면서, 그것과 다른 의견은 적대하거나 계몽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맹목적 선민의식, 그 고집스러운 태도가 세상을 망치는데 뜻밖의 기여를 하기도 하는 법이다.


 고 김정희 선생은 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로 이름이 높았고, 한예종 전통예술원의 겸임교수로 오래 후학을 양성해 온 분이었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진 것 외에 복잡하고 내밀한 사정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한예종에 출강하는 강사들 중에는 현장경험을 인정받아 학위 없이도 강의를 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법안 자체와 예외규정에 따라 선택권자가 유연하게 강사채용을 할 수도 있는 구조인 것이다. 강사법 시행으로 강사들의 생사여탈권이 담당교수 개인에게서 작게는 학과나 단과대로, 나아가 학교행정시스템 자체로 옮겨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안에도 여전히 미시적인 차이들이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의 부딪침이 빈번한데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 얄팍하고 유약한 강사법에 무엇인가를 더 보태거나 빼는 일이 가능할까? 누군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을까?


* 고 김정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