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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성 사이에 소통은 가능할까?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0-17 13:58
조회
937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한지 7년 정도 되었다. 현재 세 곳에서 하고 있는데, 수강생을 다 합치면 30명 쯤 된다. 그 중에 남자 수강생은 단 한 명뿐이다. 7년 동안의 수강생들을 모두 감안해도 생각나는 남자는 네 명 정도뿐이다.
 그래서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한국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더 행복한 것 같다,  남자들은 직업 전선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 하기에 바쁜데, 여자들은 남자들이 제공해 주는 재정적인 여유를 통해 이렇게 철학, 문학, 예술 및 다른 여러 주제들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 인간으로서 그 특유한 인문 예술적 교양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로 여자들이 누린다, 그러니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행복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의 존재를 다듬고 가꾸는 데 열심이고, 그녀들 나름의 여성적 공동성을 함께 나누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강의하는 나보다 강의를 듣는 그녀들이 더 행복하다는 묘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녀들에게서는 왠지 그동안 살아온 긴 세월에서 묻어나는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의 분위기가 풍긴다. 나는 강의를 통해 그녀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들을 매주 준비하느라 시간에 쫓기기 예사다. 물론 강의하는 데서 심지어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그녀들을 매주 한 번씩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강의는 의무고, 그녀들에게 수강은 자유다.   
 그녀들이라고 해서 나름의 고민이나 심지어 불행이라 불러야 하는 힘겨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주로 중년에 이른 그녀들에게서 자녀들을 보살피고 늙은 부모들을 봉양하느라 힘겹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녀들만을 위해 시간을 내어 강의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고들 한다. 다행이다.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그녀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가꾸는 일에 시간을 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꼭 강의를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바람직하고 그래서 더 행복한 삶의 방식이 얼마나 많겠는가.


2.
 그런데 요즈음 그녀들에게 ‘여자, 너의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열 번의 강의를 하기로 한 뒤, 여섯 번의 강의를 하고 네 번이 남았다. 이 주제를 놓고서 강의를 하려고 계획할 때부터 무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백컨대, 이 주제로 강의를 하려 한 것은 나를 위해서였다.
 남자인 나로서는 여성에 대해 모를 뿐만 아니라 여성의 느낌을 공감할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랑했던 어머니도 여자였고, 내 누이들도 여자다. 때로는 대책 없이 열정적으로 사랑했다고 여겼던 그녀들도 여자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도 여자다. 게다가 앞서 말한 내가 아끼는 열성적인 수강생들도 여자다. 그러고 보면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반 정도가 여자다. 그녀들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녀들의 느낌을 잘 느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들을 사랑하고 또는 사랑해야 하고, 하다못해 이해해야 한다. 과연 그 사랑과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혹시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가부장적인 사회문화 체제가 여전히 강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많은 여자들이 나의 삶에 여러모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남자인 나는 그녀들에 대해, 그러니까 그녀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이 지닌 그 미묘한 의미의 세계에 대해 과연 한 발짝이라도 제대로 가까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때로는 투정을 부리고, 때로는 윽박지르고,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때로는 짐짓 망각했던 것 같다. 논리적으로 따지기만 한 것은 물론이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대하고, 풍경을 바라보고, 또 사물을 느끼는 것일까? 어떤 방식으로? 궁금하다. 나는 이른바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신의 존재가 절대적이라 믿고 심지어 신학교를 다니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 또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른이 되면서 결정적으로 신을 버리게 되었고 그 이후로 교회를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신을 버리기로 결단하고 신 없이 살기 시작하면서 느꼈다. ‘아! 그렇구나.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처럼 자유로운 감정으로 살고 있었구나!’
 신을 믿다가 버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남자로서 살다가 남성을 버리고 여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 성전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 이는 마치 내가 나임을 버리고 너로서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여성인 여자와 남성인 남자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상호주관적인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달리 말해, 성 의식 사이에 소통은 가능한가? 하고서 묻게 된다.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몸과 영혼>
사진 출처 - 경향신문


3.
 하지만 이성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 하고 나아가 더 느끼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려는 자세와 마음가짐만으로도 이미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여자라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나 여자의 진짜 불행은, 그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그때는 맞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틀렸다. 어쨌든 만약 여자가 여성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남자들을 대하면, 남자들은 그녀와 소통이 된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소통은 일방적인 포섭에 의한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 당시 “오늘날 여자들은 ‘여성스러움’의 신화를 뒤엎고, 자신들의 독립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인간 존재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 말은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 사이에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생긴 몸의 생물학적인 차이와 그 기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성 사이의 소통에서 생물학적인 근본 차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 차이는 동성 간의 소통과는 다른 새로운 소통의 영역을 만드는 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성 간의 소통에서 문제는 사회경제적인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구조 때문에 생겨나는 양성 사이의 일반적인 격차와 그에 따른 차별일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물학적인 차이마저 차별의 근거가 된다고 여기는 일반적으로 체화된 의식일 것이다.
 성 관계와 관련해 나의 의식을 반성해 본다. 남성에 속한 나는 여성에 속한 여자들을 만난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위협으로 느끼거나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물어본 적도 없고 명백한 근거도 없지만, 나 말고 다른 남자들도 대개 그럴 것이다. 과연 여자들도 남자들에 대해 그럴까? 이 역시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들을 만날 때 일반적으로 왠지 모르게 위협을 느껴 불안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경계할 것 같다. 이런 나의 추정이 틀리기를 바란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보부아르 말 중에 ‘인간 존재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살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대목은 이런 나의 추정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한다. ‘인간 존재로서의 조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잠재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어서도 안 되고, 그 잠재적인 불이익이 현실화될까봐 불안해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강력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여성은 연약하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남성은 용감하고 직설적이고 진솔하다, 여성은 겁이 많고 우회적이고 음모적이다, 남성은 주체적이고 여성은 대상적이다. 이러한 차별을 수반한 편견이 집단 무의식에 의해 암암리에 또는 경우에 따라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기를 바란다.
 이런 편견은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정적이다, 남성은 논리적이고 여성은 직관적이다, 남성은 사건 중심적이고 여성은 감각 중심적이다, 남성은 집중적이고 여성은 다각적이다, 남성은 단기적이고 여성은 장기적이다, 등의 비교적 비차별적인 일반적인 차이마저 차별의 구도 속에 집어넣도록 한다. 그래서 여성이 지닌 특성들은 남성이 지닌 특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기게 한다.
 오랜 세월동안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남성 지배적인 가부장적 제도와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인 차별의 체제가 편견 형성의 원인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편견들이 체제와 제도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누구건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 역시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다르다. 남성 체계에 의해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매사에 그런 지배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 느끼고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은 다르다. 내가 여성을 이해하고자 여러 여자 이론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혁신적인 담론들에 동의한다고 해서 남녀 관계에서 이미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성으로서의 나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였을까? 일전에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제자뻘 되는 어느 한 여성을 만났다. 이야기 중에 내가 요즘 여성에 관한 강의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아니! 선생님마저 그런 강의를 하면 어떡합니까?”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힐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순간적으로, ‘남자인 선생님이 여성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여성주의 담론마저 남성 지배적인 구도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 아닙니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녀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남자인 내가 여성주의를 이해하려 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자 하고 그래서 심지어 그것에 관한 강의를 시도하는 것마저 거기에 이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성 차별의 심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남자인 개인으로서 무척 난감한 입장에 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