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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당가 7인 효행록 (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0-14 09:54
조회
1044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오백년 장구한 세월을 효(孝) 지명으로 이어온 빛 고을이 내 고향 효골이다. 고을에 들어서면 대로변에 내 고조부모의 효열비(孝烈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조에서부터 광주군 효우(孝友)면에서 효천(孝泉) 효지(孝池)면에서 지금은 효덕(孝德)동이다. 우리 8남매가 일제에서부터 보통학교, 초등학교에 입학 졸업한 광주효덕초등학교다.


  매년 2월에 효골 효덕초등학교 졸업식에 수년째 특별 순서가 있었다. 전효당(傳孝堂)의 대표인 필자는 매회 졸업생에서 선발한 9명의 효행장학생을 표창해왔다. 간단한 취지에 “변화무쌍한 현세대에서 효행(孝行)을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하지만, 효는 온고지신 마음가짐에 실천하고 장려, 사회와 가정이 바로 선다”고 강조한 내용이었다.


  필자는 “현대 물질문명과 이기 개인주의까지 만연한 세상에, 효는 절대 선이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우리 모두가 효행실천의 효야 말로 혼탁한 사회의 덕목이다. 표창 받는 여러분은 효와 학업에 충실하여 장학생으로 표창되었다.” 고 칭찬하였다.


  효행을 강조한 필자는 어려서부터 선대의 효행을 눈여겨보고 자랐다. 대로변의 비문에 7대조 선대가 손자 6형제를 두셨는데 아버지는 셋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마침 넷째 할아버지가 늦은 나이 24살에야 17살의 음성박씨와 혼인을 했다. 그런데 출가 해온지 3개월 만에 할아버지가 후손도 없이 그만 급환으로 운명하시고 말았다.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신 할머니는 양반가 체면에 재출가하지 않고 효도하면서 망부와 시가에 정성을 다해 3년 상을 모시었다. 10년을 재가하지 않고 청상과부로 살아 문중회의에서 양자를 정해주었다. 내 아버지가 숙모에게 10살의 나이로 양자가 되었다. 서당에 보낸 아들이 공부를 잘해 군 백일장에서 장원해 외로운 양모를 기쁘게 한 효자였다.


  어언 19살에 아버지는 나주의 풍산 홍문의 18살 맏딸과 혼인해 양할머니의 소원인 손자 손자를 8남매나 두니 자식농사가 풍성했다. 그때 할머니는 손주를 직접 조산원처럼 척척 받아냈고, 손주는 어머니 젖을 먹은 후에는 할머니의 품에서 나오지 않은 젖을 빨고 만지며 자랐다. 양할머니는 노련한 산모처럼 손 자녀들을 양육하시었다.


  효골에서 소문이 난 할머니는 청상과부로 재가도 않고 가문을 지켰다고, 파남함(坡南咸) 윤씨 선대 사당을 모신 서강사(瑞岡祠)종중에서 열부(烈婦)로 열부상을 받으셨다. 양자 아버지와 어머님도 생가와 양가 부모에 대한 효행실천에 효자효부(孝子孝婦)상을 받았다. 이는 선대 조부모의 효행을 이어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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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경남도민일보


 

  그런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듯이, 맏형이 해방공간에서 군청과 면에 다니면서 건국준비에 가입, 하나 된 조국을 꿈꾸었다. 부모는 물론 외로운 양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효행을 한 맏형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해 20살에 효손 효자 상을 받았다. 결혼도 미루던 형은 시국을 잘못만나 건국초기에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내 아홉 살에 형을 잃고 어린마음이지만 형이 행한 효행은 물론 분단조국의 평화통일에 다가가는 다짐을 했었다. 이후 서강사 문중에서 생가양가 조부모와 부모에 효행으로 오래전에 아내와 같이 효자효부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내 아래 아우가 3남매를 두고 지병으로 사망해 젊은 제수(弟嫂)역시 재가 않고 3남매 자녀를 육성해 효열 부상을 받았다.


  이처럼 일가(一家) 3대(三代)에서 효자 열부 효부가 각각 2명씩 6명이 그리고 돌아가신 맏형까지 7인이 효열․효부로 족보에 기록되었다. 이는 선대의 효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효골에 살면서 명문가의 유훈인 충효가전(忠孝家傳) 문중과 가훈(家訓)인 효학(孝學)과 당호인 전효당(傳孝堂)가의 정신을 온전히 이어온 효행 정신이리라.


  필자는 양할머님 생전에 유언을 여쭈었다. 67년간 떨어져 지낸 양할아버지 영혼과 함께한 쌍분묘에다 작은 비를 말씀하시었다. 할머니의 당당한 뜻으로 아버님과 상의하여 효손으로서 약속하고 할머니의 유언을 실행하였다. 효골윤문 재각 옆에 백부가 비문을 짓고 손자가 글씨를 쓰며 일가친척 모시고 효열비 제막했는데 유언을 따랐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어 문중묘원에 모시면서 효자효부 비를 후손들이 함께 세워드렸다. 과제였던 맏형이 65년 만에 과거사진상위에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했다. 그리고 최종 대법원에서 보상판결이 확정되었다. 가문과 맏형의 전효당 삶과 분단조국 통일의 뜻을 이루는 날을 간절히 기원한다.


  또한, 필자는 함안윤씨대종회 종중회장으로 8년째 종중의 효행표창을 매년 정기총회에서 표창하였다. 그리고 지난 5년 전부터 나고 자라고 공부한 효덕초교 모교에 매년 8-9명씩 효행장학생을 선발하여 졸업식에서 직접 장학금과 표창장을 전달함으로써 가훈인 효행을 실천하고 있다.


  이는 이 시대에 효정신이 점점 잊혀져가고 물질만능주의 현상을 보면서 효자로서의 효행 실천이기도 하다. 새삼 효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효정신의 근본개념을 영구히 이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인간의 기본 도리다. 그리고 나라와 사회에 기여하는 마음과 충효정신으로 살아간다면 보다 훈훈한 사랑과 인간성이 높아지는 삶의 터이다. 우리 모두와 이웃들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 그 어떤 일에도 화해와 평화가 다가올 것이다.


  이 땅에 오래전 군사문화가 횡횡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 제일주의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권력과 금력이 합세한 세력에게는 효행이 그리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효를 자랑스럽게 행하고 장려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고 인간적인 정신을 이루어 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 가득하다.


  * 윤영전(尹永典) 아호: (九巖 孝崗) 당호: 전호당(傳孝堂) (二歡堂) 효행상 2회 수상
  서초문학상. 오마이공모 우수상. 국회민족평화통일상. 서예초대작가. 한국작가회 회원
  한국작가회 소설가. 한국문입협회 수필가. 한국서예, 전통서예 초대작가. 칼럼니스트.
  저서:소설집 (못다 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에세이집(평화, 그 아름다운 말)
  수필선 (강물은 흐른다) 고희문집(인연, 아름다운 만남) 애창가곡집 (CD)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