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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에서 우리가 착목하지 못 한 것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27 10:05
조회
532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올해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100 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사실상 거의 모두 다 붕괴된 현재 러시아 혁명을 기리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없거나 심지어 정신이 나간 사람들끼리의 말장난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학술적인 차원에서든 운동적인 차원에서든 러시아 혁명은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과 토론의 주제로 남아 있다. 특히 100년을 맞는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의 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의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 다른 국가들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다양한 학술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정설에 문제제기를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나마 학술적 논쟁의 자리에서는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특히 운동사회에서는 기존의 논의의 틀에서 벗어난 문제제기는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새로운 비판적 주장들은 진지한 논의 없이 기존의 사고의 틀에 의한 공격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혁명과 그 혁명이 낳은 체제 자체에 대한 논의는 말 할 것도 없지만,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의를 찾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스탈린 이후 전 세계에 수립되었던 현실사회주의체제는 원래 우리가 꿈꿨던 사회주의체제와 아무런 상관없다며 마르크스로 돌아가거나 레닌으로 돌아가거나 트로츠키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그 수와는 상관없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혁명에서 찾아야 할 의의일까?


  또 다른 이들은 사회주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과거 존재했던 사회주의체제는 별도의 영역인 양 사고하고, 또 어떤 이들은 현실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진지한 고민 없이 무조건 노동해방, 자본주의체제 철폐를 외친다. 양자 모두 너무 역사와 민중 앞에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반대로 서구에서 발달되었던 화려하지만 도무지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각종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관념적 논의들로 비판과 반성의 자리를 메우는 이들의 행위 역시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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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11월 8일 소비에트총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사진 출처 - 위키미디아


 

  국가사회주의체제의 국유화와 관료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 생산 통제, 생산자 직접민주주의, 민중자치권력과 노동자자주경영 등의 원칙들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 단위도 아닌 일부 국가 내 일부 지역들에서의 성공만으로 현재의 국가와 시장을 넘는 대안체제를 건설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원칙의 확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제 철저하게 사적 소유와 시장체제를 철폐한 완벽한 대안체제를 구상하는 것, 나아가 그를 위해 싸우는 것은 더 이상 러시아 혁명의 현재적 의의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베네수엘라는 바로 이러한 주장이 타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베네수엘라의 소위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환호했던 많은 이들이 베네수엘라 모델의 위기에 대해 미국의 노골적 개입과 자본과 우파 정치 세력들의 사보타지, 그리고 에너지 가격의 폭락이 현재 위기의 주범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혹은 과도한 민영화나 해외 자본 투자 유치 등 좌파 정권 하 관료들의 우파적 정책 채택이나 부패 문제도 위기의 한 중요한 원인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만이 사실이다.


  사적 소유와 시장은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개입하되,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서 폐기되었던 사회적 소유의 실험과 생산 과정에의 노동자 통제, 작업장 뿐 아니라 거주 단위에서의 직접민주주의 등을 통해 사회로 하여금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가도록 설계되었던 이 실험은 생산성 문제와 결합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인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즉 소유의 사회화가 달성되고 노동자들의 직접 민주주의가 확보되며 재분배 정책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생산성 문제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위기는 곧바로 발생한다. 계획 경제의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해서 시장의 장점을 이용하려는 방향은 옳았지만, ‘사회적인 것’이 ‘사적인 것’을 대체하려는 것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적인 부분에서의 경제 권력에 대한 융통성 있는 개혁 실험에는 실패함으로써 위기가 발생한 측면이 크게 된 것이다.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위에서의 실험과 같이 러시아 혁명을 현재에 되살리려 했던 매우 중요한 변혁조차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 실험들도 여러 요인으로 인해 현재 좌초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가장 사회주의의 원칙에 가까웠던 가장 최근의 사회변혁의 대실험조차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의의를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에서는 좌파들이 무조건 대공장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체라고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베네수엘라에서의 새로운 실험의 주체는 계급적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 어려웠던 기층 대중들이었다.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중심부가 아닌 비서구 주변부 지역들에서는 조직화되기 어려운 수많은 비노동자계급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가난한 기층 대중들이 비공식 영역, 반범죄화된 집단과의 구별이 어려운 상태로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었던 베네수엘라 좌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혁명을 위한 노동자 계급 조직화’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혁명으로 이르는 고전적인 길은 더 이상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맞지 않으며, 그러한 결과로 낳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필연적인 결과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나 현재 자본주의의 위기에 환호하고 궁극적으로 체제변혁을 부르짖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제는 변혁이나 혁명으로의 과정 자체나 그 필연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적 변혁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거나 확실한 대안 체제 모델이 없으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모순과 문제는 있으되 그 근본적 해결방법이 모호한 현재 오랜 원론들을 되풀이하는 데에만 집중하거나 무책임한 급진적 관념적 주장들만 나열하는 것은 역사와 민중 앞에 무책임하다. 아님 말고 하고 포기하거나 버리면 되는 실험 대상이 바로 사물이 아니라 노동 대중,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러시아 혁명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사회 변혁의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의 개념으로 소위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분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가들은 거지, 부랑자, 사기꾼, 깡패, 각종 범죄자, 성매매 여성 등등 이들 ‘불건전한’ 하층 계급에 대해 안타까움보다는 혁명을 방해하는 경멸적인 존재로 규정했기에 조직화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동원되기도 하는 심지어 반혁명 세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러시아 혁명은 바로 이러한 집단의 혁명적 전환에도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그 비중이 적었다고 할 수 있는 주변화된 집단들은 자본주의체제가 발달하면서 점차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변화를 겪어 왔다. 일반 노동 대중들이 빈곤한 국가나 복지가 취약한 국가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이러한 주변화된 비공식 구조로 흘러들어가 반사회적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이들의 구조 내에서 최하층을 이루는 집단은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혁명 이후, 깔끔하게 정돈된 지식인들의 담론들 속에서 그 어떤 사회변혁이나 사회개혁의 이론도 전혀 이러한 부분의 변혁을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주변화된 집단들, 특히 이들이 집약되어 있는 성산업 등 비공식 경제 영역들과 그곳에서 암약하는 집단들의 축소 없이 이루어지는 그럴싸한 논의들은 모두 수면 위의 깔끔한 세상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혁명은 수면 아래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추상적인 체제 혁명이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진정한 혁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러시아 혁명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