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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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진실과 진리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6:09
조회
72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명색이 철학을 업으로 삼은 지가 굳이 셈하자면 삼십 여 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인권연대 수요산책에 글을 쓰면서 철학 전문의 글은 그다지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랜 만에 제법 철학 냄새를 풍기는 글을 써 보고자 한다.


다름이 아니라, 약간 헷갈릴 수도 있는 진실과 진리를 억지로나마 구분해 보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면, 진실은 허구일 수도 있다. 아니, 허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욕망을 더욱 그럴 듯하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을 때 진실로서 작동한다.


그 반면, 진리는 인간의 욕망 충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속된 말로 하자면, 진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예컨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라는 것은 진리다. 그리고 “질량을 가진 두 물질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서로 끌어당긴다”라는 중력 법칙은 진리다. 뭔가가 분명하게 있다면,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은 진리다.


진실은 욕망에 따른 바람과 관련이 있다.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 그 뭔가가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면 그 믿음에 의해 전혀 새로운 현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에 따른 권력이 생겨나게 된다. 믿음과 현실 그리고 권력이 한데 결합하게 되면 거기에서 진실이 생겨나게 된다. 권력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미리 결정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고자 의지를 발휘해서 태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들의 계획에 의해 태어났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른 계획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이게 진리다. 이러한 진리를 기본조건으로 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고 이유를 찾으려 하고 목적을 설정하려 하고 가치를 획득하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을 둘러싸고서 대단히 근본적인 욕망이 작동하면서 앞서 말한 바람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진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오히려 삶의 충분조건처럼 여기면서 삶을 영위한다.


20170726web04.jpg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진리는 근본적으로 욕망에 따른 바람과 무관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냉소적이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는 인간들은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 메말라 보이기 일쑤다. 감동한다거나 매혹된다거나 혐오한다거나 하는 이른바 감정적인 구석이 거의 없다. ‘무념무상’ 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운운하거나, ‘중성(中性)’ 또는 ‘사물성’을 중시하거나, ‘거리두기’ 또는 ‘내버려두기’를 제시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제법 쓸모가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거의 쓸모가 없다. 욕망과 바람에 의거해서 삶의 충분조건을 찾아 헤매다 지친 사람들에게 “그 보라니까! 그냥 살다 가는 거야” 하고서 핀잔을 준다. 그 결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현실사회 속에서 쫓겨나기 일쑤고 자칫 목 매달리거나 독배를 마셔 사형당하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긴요하다. 역사를 보면, 진실 속에는 예사로 허구가 끼어들어 있어 그 허구를 기반으로 진실이라는 명목 하에 삶의 이유와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향한 여러 다양한 길들을 완전히 차단하고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나타나 진리에 의거한 삶의 기본조건을 제시하면 그 기본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의 삶을 기획할 수 있음이 폭로되면서 기존의 착취의 권력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실에 의해 진리가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술이다. 오늘날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면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의 고도과학기술만이 아니다. 인간을 부리는 경영학이나 행정학 또는 사회공학 및 정신분석학 등의 기술이 어쩌면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욕망과 바람의 방향에 의거해서 진실 형성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사실, 그러한 진실의 방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진리를 다르게 활용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진실의 복잡성이 강화되면 될수록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끼어들 여지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 등등.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게 될 때, 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는 순수학문에 종사하는 자들은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사회로부터 심지어 무능력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토사구팽의 꼴이다. 저 밑바탕에서는 진실이 진리를 활용하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진실이 진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꼴이다.


글을 마무리하려니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대략 알아서들 이 글에서 진리가 아니라 진실을 파악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진실의 문제인가 아니면 진리의 문제인가? 인권은 진실의 문제인가 진리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정의는? 국가는? 자유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은?


이 글은 2017년 7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