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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되는 과정을 피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자Ⅱ (마흐디 압둘 하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51
조회
352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 팔레스타인인들의 노력


지난 60년 동안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추방지와 망명지 그리고 조국에서조차, 아랍주의자 국제적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내부 담론은 에밀리 하비비의 소설 『낙관론자』였고, 우리의 외부 담론은 갓산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로의 귀환』이었다. 우리의 정책은 살라 칼라프(아부 이야드)가 한때 ‘no-yes’(거절과 수락을 동시에)라고 설명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상황판단이 빠른 ‘no-yes’의 달인이었다고 논평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기간 동안, 우리는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노선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우리의 조국과 애국심,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우리는, 이탈리아 철학자 가람치가 말했던 바와 같이, 정신적 비관론의 상황을 머뭇거리며 의지의 낙관론으로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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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이스라엘 국가 건설 20년 후, 1967-1974년 외부담론은 유엔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나의 손에서 올리브 가지를 떨어뜨리지 마라”, 반면 시민사회에서 주장하는 내부 담론은 “회복력 증진”이었다. 외부 내부 담론 양 측은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말을 수용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거대한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견고한 의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팔레스타인 조국의 22%에 불과한 지역에 건설될 팔레스타인 국가가 얼마나 작은지를 표현했다.
□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인은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


이스라엘의 점령은 언제나 우리 민족의 계획을 방해했다. 우리와 충돌하고, 팔레스타인 조국 안팎에서 우리 지도자를 살해하고,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해서 사브라와 샤틸라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레바논으로부터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추방하였다. PLO는 미국의 조정, 아랍의 감시, 이스라엘의 묵인으로, 그리스해 항구를 통해 튀니지로 이주했다.


12년을 더 기다려서 1994년(오슬로 협정) 우리는 국제적인 합법성을 얻고, 유럽의 개입과 형제들과 동지들의 임시적이고 긴급한 조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내부 유혈분쟁을 중단하고, 추방된 PLO지도부가 귀환하였다. 12년을 기다리는 동안, 조국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더 커져 갔고, 해외 지도자들의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12월 발발한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와 새로 결성된 인티파다 통합지도부가 내부와 외부 세력들을 결집하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했다.


인티파다의 철학은 ‘백색혁명’과 새로운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략 초안이었다. 이 전략은 “나는 당신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없고, 당신은 우리 조국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두 국가 창설에 기반을 둔 정치적 해결을 위한 협상 및 화해로 가는 제3의 길을 요구한다"라는 주장에 근거했다.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는 인티파다를 수용하고 알제리에서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이 점령지(가자와 서안)에서 발발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에 공감하였고, 심지어 이스라엘인들조차 떠났다. 미국이 PLO를 인정하였고, 1989년 5월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에게 대이스라엘이라는 비현실적인 비전, 팔레스타인 땅의 합병,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점령촌 활동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이웃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90년 10월 1일 알-아크사 사원의 안뜰에서 21명이 사망한 학살을 저지르는 등, 민중의 인티파다를 소멸시키고 인티파다 통합지도부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점령지에 대한 억압적인 식민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 시류에 편승하는 신기루 협상들


역내에서의 사건들(1990년 걸프 전쟁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모든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우산은 역내 국가들을 보호하고 침공을 종식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팔레스타인 카드는 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고, 이스라엘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1990년 10월 30일 개최된 마드리드 회의에 팔레스타인-요르단 공동대표, 역내 당사자들과 국제 당사자들과의 협상에 참가하도록 하는데 활용되었다.


마드리드 회의 이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들’로 바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들에 참가했고, 당시 이 협상들은 사실상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이 협상들의 주도권이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엘리트들로부터 망명중인 고립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넘어가면서 협상 장소는 오슬로로 옮겨졌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튀니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을 암만과 카이로가 공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점령지라는 길고 깊은 터널 밖으로 밀어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 모두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을 중단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당국이라는 상자’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자치정부 당국이 역내 국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기도한다. 그들에게 협상은 ‘생명의 길’이었다!


우리가 위키리크스에 있는 협상 문서들을 검토했을 때, 우리가 투쟁해왔던 것들, 즉 점령 종식, 조국 해방, 점령촌 건설 중단, 토지몰수 중단 등을 찾지 못했다. 예루살렘 출입구들은 우리가 이슬람 모스크와 기독교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있지 않았고, 우리의 국기는 오리엔트 하우스와 예루살렘 성벽에서 내려졌으며, 708km의 인종차별적인 분리장벽이 건설되었다. 우리의 5만 명의 수감자들과 억류자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이 수감자들은 창살 뒤에서 고통을 끝내고 그들의 존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며 4, 5개월 동안 단식투쟁을 하였다. 가자지구에 대한 네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아픔과 고통이 증폭되었으나, 이 전쟁에 대하여 암만이나 카이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가자지구 대파괴 이후, 몇몇 국가들이 샤름 알 셰이크에서 만나서, 가자지구 재건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 지원으로 허구적인 수십억 달러를 제안하였다.
□ 협상도 저항도 없이, 무너지는 팔레스타인 사회


우리의 주된 걱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이라는 케이크’인 18만 명의 고용인들이 제공하는 행정업무와 서비스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한 부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신성한 안보협력’이라는 의제와 ‘협상이 생명이다’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서안이고, 다른 한 부분은 지하터널을 포함하여 ‘평화의 종착역’이라는 의제와 ‘수년간의 휴전’이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가자지구다. 그러나 두 지역들, 서안과 가자에서 협상도 없고, 저항도 없다. 오히려 난민촌에 비참함과 절망만이 존재한다. 난민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교, 특별한 행사와 종교 축제에서만 들린다.


이제 우리는 호텔, 은행 대출, 회사 주식의 확산과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와 무관한 상업 엘리트의 재왕절개에 의한 출산이었다. 두 번째는 여전히 권력의 자리에 있는 파벌 엘리트의 탄생이었다. 세 번째는 학생들의 가방에서 칼을 압수하는 것을 자랑하는 준군사안보 엘리트이다. 네 번째는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프로젝트, 항만과 공항, 건설에 관한 투자 프로젝트를 찾는 일종의 시민사회 사업과 비정부기구들이다. 예루살렘은 성벽 뒤에 버려졌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역사유적과 종교유산 강탈을 애통해하고, 예루살렘 청년들은 아랍인들과 범아랍주의를 비판한다.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와 성묘 교회는 예배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한다. 예루살렘 도시는 이슬람교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을 조롱하는 반면, 망명 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정체성, 조국, 기억을 찾으며 자책한다.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주거, 일자리, 건강, 교육,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요구에 사로 잡혀있다. 벨푸어의 범죄와 불행한 선언이 1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집회, 기념행사 등의 현상이 확산되어왔다. 유일한 예외는 교육, 예술, 회화, 발명 등의 분야에서의 개별적인 팔레스타인인의 성공과 탁월함이다.


이 시나리오의 중반부에서 텔아비브는 2009년 헤르츠리야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화’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의 추정되는 목적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약속하고, 40%의 임금 인상 약속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직원들을 매수하려 시도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의 섬을 만드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최종지위 결정 문제는 뒤로 미뤄질 것이고, 가자지구에 있는 200만 명은, 불확실한 미래에 남겨져서, 라파 국경을 찾거나 터키, 키프로스, 심지어 미국의 중재로부터 나오는 항구도시 프로젝트를 찾을 것이다.


서안에서의 인종차별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인종, 종교, 정체성을 근거로 권리와 이익에 대한 차별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인 주거지는 팔레스타인의 12%로 제한되었고, 70만 명의 유대인 점령민들이 서안에서 날뛰며,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하고 식민촌을 건설하면서 확장해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1967년 휴전선 안(현재 이스라엘)으로부터,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시민권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평등권과 정의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투쟁한다. 그들의 길은 1948년 나크바(재앙, 이스라엘 국가 건설)로부터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길고 험난하다. 그들은 점령지 대중의 저항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 시민으로서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도록 점령지 대중저항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는 시온주의 우파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스라엘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든 정당과 협력하는 것이 현재의 임무라고 말한다.
□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자


더 큰 불행, 즉 조국, 민중과 우리의 권리로 남아있는 것을 제거하려는 ‘청산의 수순’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전략은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고, UN안전보장이사회부터 시작하여 최근 UN 안보리결의안에 비추어, 이스라엘 점령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계속해서 모으는 것이다. UN과 국제사회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야 하며,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기타 국제기구에 가입해야 한다.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대의의 국제화, 조국에서의 팔레스타인인들 통합, 점령에 관한 모든 형태의 협력 거부와 중단, 그리고 점령 세력에 대한 기소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전략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청년운동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존엄하게 살기 위해 저항하라"라는 기치 아래 계속되어야 한다. 청년은 저항의 도구를 명확히 해야 한다. 첫째, 팔레스타인 민족 서사, 유적, 유산에 대한 지식과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에 맞서는 불매운동, 투자 철회, 경제제재(BDS)와 이것을 해외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셋째, 두려움의 문화를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넷째, 팔레스타인 내부의 부패, 무질서 및 선동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전의 투쟁에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정당성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끝내고, 미래의 지평을 열어주자.


이 글은 2017년 2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