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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언니는 왜 선거에 나가게 됐나?” (신하영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20
조회
322

- ‘풀뿌리여성포럼’을 보면서...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원들의 비율은 더 늘어났다.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한 명이긴 하지만, 선출직 의원의 수가 비례직 의원의 수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전체 300석 중 51명(17%)이 여성의원으로, 이 중 26명은 선출직, 나머지 25명이 비례직이다. 이러한 여성의원들의 증가로 인해 ‘성평등 국회’로 가야한다는 말들이 오간다. 정세균 국회의장조차 “아직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며 성불평등이 가장 심한 분야가 정치권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정도로-그것이 립서비스라 하더라도-, 여성들의 정치참여는 이제 누구나 대놓고 불평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상임위원장의 자리배정을 놓고 보면 이번 국회가 성평등 국회를 지향한다는 것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18개의 상임위원장 자리 중 단 2개만이 여성의원에게 돌아갔다. 예산결산위원회의 김현미 의원, 여성가족위원회의 남인순 의원이 그들이다. 여성가족위원회는 당연히 여성의원의 몫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결국 1명의 여성국회의원만이 위원장의 자리에 앉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것은 양성평등기본법에 명시한 특정성별이 60%는 넘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곳으로, 사회 각 집단들에 대한 대표성이 발현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여성들에 대한 대표성이 30%도 아니고 17%에 불과하며, 위원장의 비율은 11%에 머물고 있을 때 과연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60622web05.jpg사진 출처 - 경향신문


흔히 이제 여성문제는 없거나, 대부분 해결되었거나,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며, 정치에서의 할당제를 비롯하여 여성운동이나 여성의제에 대한 역풍이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항상 있어왔던 문제이긴 하지만, 이러한 역풍의 바람을 타고 상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영역에서의, 그것도 평등한 대표성을 가져야 할 국회라는 거시적 구조에서의 불평등과 차별이 여전하다고 할 때,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혹은 공과 사가 얽혀있는 지역차원에서의 여성에 대한 시선은 어떠할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오늘 “왜 옆집언니는 선거에 나가게 됐나?”라는 풀뿌리여성포럼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선거는 끝났지만 정치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정치가 거대담론을 다루는 특별한 누군가의 직업이 아니라 일상과 삶의 모든 문제들을 의제로 다루며, 따라서 삶을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정치를 삶으로 살아내는 누군가도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삶의 정치’를 어떻게 지속하고 확장해내면서 이것이 제도정치와 연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사례발표자로 나온 이는 원내에 뿌리가 없는 소수정당에, 나이어린(?) 여성이었다. 그는 나름 풀뿌리시민운동이 발달한 작은 지역에서 출마하였고, 지역 풀뿌리 조직들의 지원도 받고 있는 후보였다. 그러나 그동안 그 지역이 보여온 지역활동과 지역정치에서의 선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정당에서 나이도 어린 것이, 거기다 여자가 무슨 정치를 하겠느냐는 비판과 더불어 폭력적 상황까지 겪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양성평등’의 모습이고 ‘여성상위’의 모습이다. 여성들에게는 ‘유리천장’이 아니라 여전히 콘크리트 천장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속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여전히 기득권 정당 중심의 이기적인 정치제도로 인한 소수정당 및 소수자들의 정치진출에 대한 제도적 한계와 이의 결과로서 현실 제도정치권을 중심으로 정치를 사고하는 시민들의 편협한 의식, 다음으로 그동안 ‘여성정치세력화운동’이 제도정치를 중심으로 흘러온 것에 대한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 정치란 남성중심의 정치문화와 구조를 바꾸어내는 것과 더불어 공과사로 이분화되어 있고 이로부터 성별역할분리에 따라 공적인 영역은 남성, 사적인 영역은 여성이라는 구도를 해체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인 것의 공공화, 혹은 공론화는 단순히 여성만이 아니라, 공적인 정치영역에서 배제된 수많은 소수자들과 그들의 의제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주변인들의 세력화와 더불어갈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풀뿌리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대다수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을 대표하거나, 대표해서 발표하거나, 대표해서 포상을 받는 이들은 남성들이다. 오늘 사례발표를 한 조직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들의 풀뿌리 활동이 여성주의적 풀뿌리 활동과 풀뿌리 정치로 이어지고 있는가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성정치가 생활정치, 삶의 정치를 표방한다고 할 때 이는 제도정치권의 소수자 배제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자하는 초당적인 범 여성의원 연대활동과 더불어 풀뿌리 정치, 지역정치를 펼치고 있는 다양한 조직들과의 연대활동 역시 전개해나가면서, 제도권 안팎으로 여성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연대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세력화는 조직화 없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연대는 조직화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여성정치학은 다른 말로 ‘인권의 정치학’이기도 하였다. 여성의 권리를 인권이란 이름으로 명명하고 여성의 문제를 ‘국가의 책임’으로 만들어 낸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정치학은 시장이 시민권을 잠식하는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어 온 담론이자 실천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성정치는 인권정치, 즉 소수자와 주변적 존재들의 사회적 주체화를 위한 정치여야 한다. 이는 여성운동이 단순히 남성권력을 나눠달라거나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원리를 뛰어넘어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와 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대안의 담론이자 실천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담론의 갑론을박을 보면서 여성의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담론이 이제 여성운동계 내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성운동은 ‘여성의 권리는 인권’에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담론을 통해 ‘개인여성의 권리를 인권으로 개념화하고 정치적 의제화’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도 그러한 실천이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고민해봐야 할 때가 된 듯하다. 여성들의 인권의 정치학은 지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곧 여성운동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이 대안의 사회운동으로 가기위해 현재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치(운동)에서 여성운동은 무엇을 잊거나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풀뿌리로부터 제도권까지 도착하는 것이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면 여성정치는 지금 어디선가 길을 잃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범여성 세력들의 진지하고 치열한 고민과 논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그 실천에는 유명하지 않은 ‘옆집 언니들’의 정치도전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폭력과 냉대, 외면 속에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