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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정보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16
조회
252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힘든 걸 다들 묵묵히 해왔단 거야?”


백일 갓 지난 갓난애를 둔 후배는 정말 다들 이런 식으로 아이를 키워왔단 거냐며,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한 거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에게 마흔 넘어 아이를 낳고, 피붙이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말해줬더라면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며. 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엄마의 전쟁>이라는 다큐가 SNS상에서 꽤 논란이 되었다. 양육에 대한 책임을 엄마에게 전적으로 지우고 ‘엄마 노릇’을 빼고는 엄마의 다른 정체성이나 자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남편들과 그 점을 교묘히 부각시키는 제작진의 의도가 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된 여자는 다른 욕망이나 자아실현에 대해 말을 꺼내서도 안 되며, 엄마 노릇을 하느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혹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노릇을 훌륭히 해내야만 제대로 된 엄마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된 여자도 ‘엄마 노릇’으로 존재 가치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라는 직업』을 쓴 헴마 카노바스 사우의 말처럼, 여성의 정체성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규정되거나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엄마가 아닌 여성에 대해서 불완전한 존재 혹은 뭔가 부족해서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거나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왜 엄마는 ‘엄마 노릇’ 말고 개인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 안 되는가? 왜 아이 양육과 관련한 여러 문제와 해결책에 아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가? 얼마 전 『엄마라는 직업』을 출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해 속 시원하게 엄마의 입장에서 대놓고 문제 제기하는 책이 별로 없는 데다, 이 책은 현실적으로 엄마 자신과 그 주변 인물, 기업, 정부가 어떤 현실적인 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안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L사진 출처 - 예스24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마음속에서 고동치는 주체인 ‘여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그저 기존 구도 속에서 엄마 노릇을 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법과 가치관을 퍼뜨리고 있다. 이 시대 엄마들은 한편으로는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물려받았고, 한편으로는 여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샌드위치 세대’이다. 만약 누군가 이 사회에서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자녀를 돌봄과 동시에 자신과 일에 집중하면서 완벽한 가정을 일구어야 하는 ‘100점짜리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회적 통념에서 오는 불쾌감, 임신 때문에 직장에서 겪는 불이익과 불편, 가정과 직장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 등을 모두 감수해야 한다.


직업이 따로 있는 엄마는 (모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원하는) 자기 자신을 벗어던져야 하는 전통적 남성 위주로 짜여 있는 직업 세계의 구조와 맞닥뜨리면서, 가정과 일 모두를 잘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사회에서 ‘모성’은 엄마들에게 ‘엄마 노릇’을 강제하고 싶을 때 가져다 쓰는 도구일 뿐이다. 육아휴직을 둘러싼 논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아이의 양육과 관련한 이슈가 생겼을 때 엄마들은 능력 없고 민폐 끼치는 동료가 되지 않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야 하는 형편이다. 아이 양육을 온전히 개인이나 가족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해서 키워야만 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저출산이라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엄마라는 ‘직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여성들이 처한 개인적, 사회적 현실에 대해 제대로 말해야 할 때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더 이상 엄마들에게 모든 것을 떠안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 덧붙인다면, 『엄마라는 직업』에서 저자가 말한 여러 대안들을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특히 일과 가정을 배려한 정책 - 자녀를 출산하거나 입양했을 경우 남자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거나, 특정한 기간이나 상황에서 자녀와 가정을 돌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노동시간을 기업이 운용하도록 하거나, 양육비의 적극적 지원, 어린이집이 고품질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찰과 감시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현실적인 제안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본다.


이 글은 2016년 4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