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당대의 한국철학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5:11
조회
473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각자의 개인적인 삶에서건 집단의 공동적인 삶에서건 철학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하는 철학은 과연 일반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주체의 행동을 사실에 따른 기능의 차원에서 의미에 따른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정신적인 위력을 뜻한다. 그런 다음, 어떤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추구해 나가야 하는가를 반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더 나아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이를 저해하는 요인들, 즉 왜곡된 또는 강압적인 기존의 가치들을 제거해 나가는 투쟁적인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그리고 끝으로, 비판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실현된 가치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즐기면서 누릴 수 있게끔 확산・심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학은 가치투쟁의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지닌 철학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을 궁구한다면, 그 철학은 기본적으로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논의의 편의상, 이 철학을 일컬어 ‘당대의 한국철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특수한 철학이라고 해서 철학 자체가 어차피 지닐 수밖에 없는 일반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굳이 말한다면,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 이른바 당대의 한국철학은 ‘특수한 일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을 포착해내지 않고서는 당대의 한국철학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로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면 관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사안 자체가 워낙 중차대한 나머지 치밀한 사유를, 게다가 공동적인 치밀한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직은 전혀 설익은 생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시론(試論)의 차원에서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핵심적인 가치투쟁의 계기는 이른바 ‘분단체제’에서 형성된다. ‘체제’는 그 체제 하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및 무의식을 지평적으로 규정하는 비인격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때 체제의 비인격적인 힘은 사람들의 인격을 외부에서부터 그리고 심층에서부터 규정하게 된다. 이로써 체제는 사람들이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사람들의 주체 속에 내면화되어 인격적인 기반으로 작동하는 욕망과 감정을 조절 ‧ 규제하게 된다.


분단체제는 분명 외부세력에 의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 강압된 결과물이다. 그 강압의 과정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전쟁마저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분단체제를 그야말로 강력한 체제로, 그러니까 분단이 의식/무의식에 대한 체제적인 규정력을 확고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일군의 연구자들은 ‘분단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주조해 내어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까지 했다.


가치투쟁의 인격적인 기반인 욕망과 감정에 관련하여, 분단체제가 내면화됨으로써 발휘하는 섬뜩한 내용은, 무엇이든지 적대적으로 분단되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 또는 우리에 대해 적대적인 자 또는 세력이 현존한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평화 또는 평화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증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평화에 대한 불안증은 분열증을 낳게 된다. 적은 없애야 한다. 그런데 적이 없으면 불안하다. 적을 공격해서 없애고자 하면 할수록 불안은 가중된다. 적을 공격하면서 적을 키워야 한다. 이른바 자기공격적인(self-defeating) 분열증을 낳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영역에서 예사로 ‘패권’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사회적으로조차 지역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이러한 분열증적 근본불안에 시달리는 상태로는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이른바 ‘반동성’ 즉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서만 운동을 하는 주체 아닌 주체의 성격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다. 마치 주체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적을 압도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주체는 오히려 철학자 푸코가 말한 권력관계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과 같다.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진짜 주체는 반동적인 주체로서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결여된 가짜 주체다. 이러한 ‘가짜인 진짜 주체’들이 모여 만들어나가는 한국사회에서 과연 누구나 흔쾌히 즐기면서 누릴 수 있는 가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가치투쟁을 벌이는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이를 형성하고자 할 때 그 방향의 초점은 내면화된 분단체제를 뿌리 뽑는 쪽으로, 그리고 분단체제를 강요하는 지정학적인 외부세력들과 이를 우호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부세력들을 차단하는 쪽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평화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 모든 힘들을 분쇄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때 철학적인 가치투쟁의 핵심 수단은 평화일 수밖에 없다. 당대의 한국철학은, (1) 진정 평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그 가치의 위력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2)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대로 세워야 할 것이고, (3)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지닌 가짜 철학 기반을 훤히 드러내어 그 반(反)가치의 성격들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4) 그 세력들을 일소하는 데 필요한 가치투쟁의 원칙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당대의 한국철학은 ‘평화의 철학’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평화의 철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의 근본 기반은 평등이다. 평등의 근본 기반은 각자가 지닌 대체불가능성에 의거한 단독성이다. 예컨대 노동현실에서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이른바 노동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대체가능성을 한껏 높이고자 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단독성을 한껏 유린하는 것이다. 단독성이 유린되면 평등이 깨지고, 평등이 깨지면 평화는 불가능해진다. 예컨대, 1인 1표의 투표권의 평등만으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평화에 대한 불안, 평등에 대한 공포, 단독성에 대한 저항 등을 없애야만 한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자기적대적인 분열증적 모순감정을 제거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각자의 처지가 최대한 평등한 쪽으로 현실화되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심층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한국사회 특유의 내면화된 분단의식이 똬리를 틀고서 독기를 뿜어내는 한, 그런 사회경제적인 현실에서의 평등을 향한 크고 작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3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