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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내 존재의 단독성과 정치의 성립 (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50
조회
26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운영위원


“우리 인간은 지금 ·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인 사실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지금 · 여기’는 내 자신과 더불어 타인들뿐만 아니라 온갖 사물들과 사건들이 드러나는 근본 처소이다. ‘지금 · 여기’가 바뀌면 이 모든 것들의 배치와 분절 및 그에 따른 의미와 가치들이 함께 바뀐다. 그런데 ‘지금 · 여기’가 바뀔 수 있는 것은 몸의 이동의 역량 때문이다.


‘지금 · 여기’의 질적인 변화가능성 전체는 내 자신의 ‘존재’(存在, being)가 설립되는 가능성 전체이다. ‘지금 · 여기’에서 펼쳐지는 일체의 일들을 일컬어 ‘현존’(現存, existence)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 현존의 변화가능성 전체가 곧 내 존재의 가능성 전체인 셈이다. 다만,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변화’뿐만 아니라 ‘축적’이 작동해야 한다. 그저 아까의 ‘지금 · 여기’에서 지금의 ‘지금 · 여기’로, 그리고 지금의 ‘지금 · 여기’에서 나중의 ‘지금 · 여기’로 변화하는 것만으로는 현존이 존재로 변양(變樣, modification)될 수 없다.


─ ‘존재’와 ‘현존’은 워낙 다른 방식으로 성립된다. 이를 일컬어 그 양식(樣式, mode)이 다르다고 한다. 현존은 ‘현행적’(現行的, actual)인데 반해, 존재는 ‘잠정적’(暫定的, virtual)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을 ‘현행적’이라고 하고, 언제든지 드러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잠정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존이 존재로 이전되는 것을 ‘변양’, 즉 양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잠정적인 나의 존재는 현행적인 나의 현존을 통해 그 ‘부분적인 전체’(the partial whole)로서 드러나 힘을 발휘한다. ─


아까 이루어진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내 현존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건 ‘연결’되어야 하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나중에 이루어질 내 현존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건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연결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축적’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이전의 것이 지금에로, 그리고 지금의 것이 이후에로 연결되어 축적 때, 곧이곧대로 이전(移轉)되지는 않는 것이다.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아 어떻게든 ‘차이’를 일구어내면서 연결되고 축적된다. 그런 가운데, 내 존재는 계속 새롭게 열리는 내 현존을 통해 부분적인 전체로서 ‘반복’된다. 하지만 그럴 때 내 존재의 반복은 곧이곧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존재는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내 현존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계속 새로운 부분적인 전체로서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계속 새롭게 주어지는 내 현존의 활동 결과들이 연결 · 축적됨으로써 내 존재가 바뀌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행적인 내 현존이 잠정적인 내 존재를 계속 새롭게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잠정적인 내 존재는 계속 새로운 부분적인 전체로서 연속해서 새롭게 주어지는 현행적인 내 현존 및 그 활동에 대해 작동하여 힘을 발휘한다. 결국, 내 존재는 내 현존을 통해 계속 차이를 드러내면서 반복되는 것이다. 내 존재는 반복되면서 새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그렇게 차이난 상태로 반복되면서 내 현존이 그렇게 드러나도록 한다. 또 그렇게 드러나 활동하는 지금의 내 현존의 결과는 계속 새롭게 활동하는 내 현존의 결과들과 수평적으로 연결되면서 수직적으로 내 존재에 축적된다. 여기 내 존재와 내 현존 간에는 복잡한 일종의 뫼비우스 띠의 관계들이 작동한다. 유념해야 할 것은 내 주체는 항상 현행적인 내 현존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지 잠정적인 내 존재의 차원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151125web01.jpg사진 출처 - 네이버


이때 내 존재는 다른 어느 누구의 존재와도 그리고 다른 어느 것의 존재와도 바꿀 수 없고 대체될 수 없고 심지어 근본적으로는 비교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내 존재는 ‘단독적인 것’(the singular)으로서 드러난다.


그런데, 내 존재가 단독적이라고 하나 그 단독성은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일일뿐이다. ‘지금 · 여기’의 상황에는 언제 어디서나 현행적으로건 잠정적으로건 타인들이 함께 그들 각자 나름의 현존과 존재를 발휘하고 있다. 나와 타인들이 함께 ‘지금 · 여기’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 타인들 각각의 존재 역시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단독적이다. 각자의 존재가 단독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보면(형식에 있어서) 동등하고(equivalent), 동등하기 때문에 평등하다(equal). 자유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같은 우리 각자의 단독성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정치가 성립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각자의 단독적인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요 충분한 것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 여기’에서 내 현존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단독적인 내 존재가 바탕에서 작동하면서 내 현존에 힘을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미 늘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의 현존적인 활동이 함께 작동한다. 서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서로 함께 협업 또는 분업을 하고, 서로 함께 사랑 또는 증오를 하고,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기고 하고 투쟁을 하기도 한다. 이에 우리는 분명 내 존재는 단독적이지만, 그 단독성(singularity)은 내 존재에 있어서 근본 형식(basic form)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내 존재의 실질에 있어서는(in the material of my being) 오히려 타인들과의 공동성(community)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형식에 있어서의 단독성과 실질에 있어서의 공동성은 ‘근본적으로 보아’(또 다른 의미의 ‘형식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실질에 있어서 공동성은 형식에 있어서의 단독성을 충분히 의미 있게 만드는 내용이다. 사실상 내 현존의 활동은 무조건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내 현존의 활동은 그 타인이 자신의 현존을 통해 드러내는 자신의 부분적인 전체로서의 그의 존재를 내 존재로 이전시키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결국 내 존재의 실질은 익명적인 타인들의 존재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존재의 실질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내 자신” 또는 “나의 자아” 운운하면서 그것을 붙들고서 어쩔 줄 몰라 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순수한 나의 자아’라는 것은 내 존재의 단독성, 즉 내 존재의 근본 형식의 측면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실질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텅 빈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선불교에서 “무아”(無我)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내 존재의 실질을 아예 내버리고 오로지 내 존재의 순수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실질을 ‘숭상’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면, 내 존재 자체가 이미 늘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실질을 형성하고 있는바, 뭇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획득된 내용들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앞뒤 혹은 아래위로 배치해서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수시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희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내 존재 내의 실질의 몫이 있을 것이고, 순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내 존재 내의 실질의 몫이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전진 혹은 후진 배치할 것인가에 따라 영희와 순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짐은 물론이다. 내 존재 속에서의 정치가 알게 모르게 타인들과의 관계를 결정하면서 타인들과의 정치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통령 박근혜 씨’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늘 정치적이다. 다만, 그 근본 형식에서의 기점은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이다.


이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 때문에 제아무리 복잡 미묘한 정치적인 실질도 포섭과 종속 및 그에 따른 피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공화국”이 지시하는 이른바 ‘공화주의’는 ‘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불간섭의 자유’를 주창하는 것과 달리, 기본적으로 ‘비지배의 자유’를 주장한다. 지배하더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자유주의라면, 간섭할지라도 지배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공화주의이다. 자유주의자는 국가가 지배하되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공화주의자는 국가가 간섭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다. 지배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의적인(제멋대로의) 의지에 타인을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크게 대비되는 것이 법치다.


각자의 존재가 지닌 근본 형식에서의 단독성은 누군가의 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다른 사람의 현존 활동이 결정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길 수 없도록 하는 근본 원리다. 각자의 존재가 지닌 실질에서의 공동성은 각자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간섭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근본 원리다.


그러니까 남을 함부로 지배하고자 하는 자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고 또한 간섭받기 싫어하는 자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 예컨대 메르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 격리조치라는 간섭을 받기 싫어해서 거부하는 자라면 그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보건행정직원이 격리조치를 거부하는 자를 대하면서 ‘아니, 이 사람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말을 함부로 거부해.’ 라는 심보로 그 거부하는 자를 강압한다면 그 보건행정직원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에서는 간섭하되 그 간섭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 법적 장치와 법적 장치를 어떤 내용으로 만들고 수정할 것인가를, 평등성에 입각해서 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절차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가 일방적으로 배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돈과 권력에 의거한 왜곡된 소통 대신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거한 공공성의 사회적인 확립과 확산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내 존재의 형식에서의 단독성과 실질에서의 공동성이 근본적으로 내 몸에서부터 설립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내 몸과 그에 따른 내 생명은 어느 누구의 다른 몸이나 다른 생명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야말로 단독적인 것으로서 내 존재의 형식에서의 단독성을 뒷받침한다. 또한 내 몸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몸들과 이미 늘 관계를 맺으면서 내 존재를 새롭게 형성함으로써 내 존재를 그 실질에 있어서 이미 늘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성으로 채우도록 한다. 그래서 각자의 존재가 지닌 단독성과 공동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따로 성립하거나 대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존재에서의 두 근본 원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한, 정치적인 행위가 끝없이 탈구되고 미끄러지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1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