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시온주의국가, 이스라엘 건설의 동력은 영국정책 (홍미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24
조회
581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지역 분쟁에 대하여 '종교 혹은 종파투쟁이라는 신화 만들기'는 '열강들의 석유•가스 지배권과 무기판매시장 확보'를 위한 투쟁이라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다. 20세기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은 중동지역 지배를 위한 전략적인 관문 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목하였다.



○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중요성


1946년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펴낸 Great Britain and Palestine 1915-1945에 따르면,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은 이라크 키르쿠크로부터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이어지는 원유 파이프라인의 출구로서 영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930년대 이라크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을 때, 최종적인 목적지는 유럽이었으며, 원유 파이프라인은 최소한 선박운송료의 40%이하로 운송비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하였다. 이 원유 파이프라인은 이라크 북쪽에 위치한 키르쿠크 유전지대로부터 요르단을 경유하여 팔레스타인 하이파로 연결되었다. 원유가 이 파이프라인을 완전히 통과하는 데는 약 10일 걸렸고, 하이파에 도착한 원유는 하이파 정제소에서 정유되어 탱크에 저장해서 선박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20150701web03.jpg1934 키르쿠크-하이파·트리폴리 파이프라인
그림 출처 - 필자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전략적인 이점은 현재 21세기 미국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적절한 예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키르쿠크로부터 이스라엘 하이파로 가는 석유 파이프라인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내놓았다. 2003년 8월 미 국방부의 요구에 따른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조사결과 키르쿠크와 하이파 사이의 직경 42인치 파이프라인의 건설에 1㎞당 40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이스라엘 국가 기반시설부 장관 유세프 파리츠키는 하이파 항구를 이라크 석유의 매력적인 출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보호하라: 영국-유대 무장단체(하가나) 동맹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들은 1918년에는 전체 인구의 8%인 56,000명에서 1945년에는 전체 인구의 31%인 553,600명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기간 동안에 현격하게 증가하였다. 아래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표에서 보듯이, 1918년부터 1947년까지 실시된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인구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20150701web04.jpg
팔레스타인 인구변화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이민은 1932년 이후 5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1932년은 영국위임통치지역 이라크에서 요르단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연결되는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된 해다. 이민자 유대인들은 키르쿠크-하이파 원유파이프라인을 아랍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국정부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과 하이파 정제소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제로 이 파이프라인은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지중해를 통해서 영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는 연료의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팔레스타인으로의 대량 유대이민을 추진하는 영국정책에 저항하는 아랍대반란 동안(1936-39), 아랍인들의 중요한 공격 목표 중의 하나는 키르쿠크-하이파 파이프라인이었다. 이에 맞서 오르데 윈게이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1938년 창설)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아랍인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이 파이프라인을 보호하고 아랍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결국 5만 명의 영국군대와 1만 5천 명의 유대무장단체 하가나로 구성된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이 아랍대반란을 진압하였다. 영국-유대 합동 특수야경단의 한 축을 구성한 유대 무장단체 하가나에 대하여 영국은 이미 공식적으로 불법단체라고 규정한 상태였다. 영국-유대 합동특수야경단의 아랍대반란 진압작전은 매우 무자비했다. 진압작전 과정에서 5천명 이상의 아랍인, 3백 명 이상의 유대인, 262명의 영국인이 사망하였다. 이 진압작전에 대한 포상으로 영국정부는 윈게이트 소장에게 무공훈장을, 그의 부하 장교들에게 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아랍대반란 동안 영국위임통치정부는 외딴 지역의 유대정착촌에도 무기를 분배하였다. 게다가 영국위임통치정부는 하가나에게 박격포와 수류탄 등의 무기제조를 허락한 반면, 무기를 소지한 아랍인에게는 사형을 부과하였다. 1939년 아랍대반란 진압 이후, 하가나는 완전한 규모의 명실상부한 조직과 장비를 갖춘 군대로 발전하였고, 1948년 5월 이스라엘국가 창설과 함께 이스라엘 국가방위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