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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으로 구매하는 상품화된 힐링을 넘어, 국가 책임 하의 심리 치유가 필요하다 (정재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7 14:21
조회
229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체첸 내전의 여파로 200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하곤 했다. 또한 비행기 추락 사건이나 요양원 화재 등 대형 사건들도 자주 일어나는 등 총체적 혼란이 이어졌다. 체제전환 이후 체첸 내전 등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낙후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도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테러나 사건사고가 일어난 직후 취해지는 조치들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실제 실효성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사건 직후에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 중 하나는 바로 유족들에 대한 심리적 도움 조치이다. 여러 의료진 중 한 분야인 심리 상담 전문가들을 구조대와 함께 현지로 급파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어디로 전화해서 어떻게 하라는 방송을 내보낸다.

한국은 어떤가? 최근의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형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물질적 지원이 아닌, 유족들에 대한 전문적인 심리적 치유를 국가가 처음부터 나서서 체계적으로 제공하지는 않는 듯하다. 일찍이 의료 분야에서도 공공성보다는 상품 논리에 익숙해진 국민들 역시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와 치료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정치와 경제 지배 엘리트들,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 관료들과 언론들의 무자비한 공격 속에서 트라우마가 증폭되어 28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 이후에서야 비로소 심리적 치유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지만, 이 역시 시민사회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세월호 사고 유족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유족들의 트라우마 치유는커녕 분노와 슬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용산 참사 관련자들이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아예 테러리스트 운운하며 적 혹은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지금까지 명백히 국가에게 책임이 있는 국가 범죄 희생자 유족들은 여러 독재 정권 하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트라우마를 드러내어 치유하기는커녕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이 억울함과 한을 안으로 삭히며 살아왔다. 일본군 성노예나 강제징용자 희생 유족들과 같이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은 경우에조차 대한민국 정부는 매우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 국가는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 만행에 대해서는 궤변으로 일관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또한 그런 국가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20만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희생자 유가족, 정부 발표 3만 여 명에서 비공식적으로는 그의 두 배에 달하는 제주 4.3 항쟁 희생자 유가족,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있었던 간첩단 조작 사건 희생자 유가족 등등... 누구보다 심한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 치유를 해 준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들 외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하철에서의 승객 자살에 대한 공포감과 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과도한 노동 등으로 인한 지하철 기관사들의 심리에 대해서 한 때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 강도나 환경만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의 이들 외 다른 직업군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연구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으로는 구제역 당시 대규모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공무원들의 심리적 고통에 대해 보도가 된 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크지 않다. 가령, 아무리 익숙해 있을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의사, 간호사, 검시관, 장의사, 119 구조대 등 끔찍하게 다친 사람들을 대하거나 시신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동 환경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압박감에 고통 받는 이들 외에도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질병 등 자연적인 요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것도 큰 고통이지만, 인재로 인한 사건과 사고에 의해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다. 그러나 범인을 잡지 못 하거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못 하거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 그 고통은 견디기 어렵다. 가령, 사이코패스 등 범죄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유족 혹은 미제 사건 유족들, 실종 아동 부모를 포함한 장기 실종자 가족들, 의료 사고 사망자 유족들, 학교 폭력 당사자 및 희생자 유족들, 성폭행 피해 여성들, 탈성매매 여성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유족들, 군 의문사 사고 유족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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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살처분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방역요원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구체적인 사건과 사고가 아니더라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극도로 취약한 복지제도 속에서 무제한적인 경쟁을 강요하는 정글 자본주의 하에서 배제되고 뒤처지고 불안정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 극단적인 경쟁 속에서 고통 받는 다수를 양산하고 방치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빈곤과 극심한 불평등 및 사회적 배제 현상, 비정규직과 자영업 등 불안정한 노동의 만연, 취약한 복지 혜택, 그리고 소수 기득권 지배 집단 중심의 경제 구조 등 불안정한 심리를 만들어 내는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거리에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이들 외에는 서로 간의 차별과 적대의식 속에서 사회의 거의 모든 단위와 연령대에서 각종 사기와 폭력이 넘쳐나고, 반칙과 부패가 만연해 있으며, 혐오와 불법이 극에 달해 있다. 범법과 자살이 만연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사회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치료를 필요로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환경이나 기후, 질병 문제 등으로 인한 더 큰 위험들도 도사리고 있고,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우발적인 사건과 사고도 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우리는 때로는 국가나 자본에 의해서 때로는 사회 내 기득권 집단들이나 정반대로 주변화 된 범죄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보다 더 일상적으로는 척박한 자본주의적 삶 속에서 다양하고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받고 있다. 물론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은 과거에 비해 다소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등의 피해자들이 존재하며, 사건과 사고, 재난에 대해 국가에 의한 제도화된 심리적 치유는커녕, 모종의 이해관계가 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쁘다. 사회의 불안정한 심리들은 이제 국가를 향해 저항하지 않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과 구별되는 집단에게 증오의 감정으로 변질되어 인종주의적, 반여성주의적, 반소수자적, 지역 차별적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영역과 분야의 문제를 단순화해서 정리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든 심리적 측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한 문제들은 각각 별도의 문제라고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별적으로 하는 힐링을 넘어 진지한 심리 치유가 필요한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 치유는 보편주의에 입각한 국가 복지 시스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지금과 같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무자비하게 벌어지는 극단적 경쟁 자본주의의 극복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못 할 경우 이 수많은 문제들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우리 사회를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 증오가 최소화되는 세상을 위해 세심한 관심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