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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욕망과 돈 그리고 시간(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3-24 14:07
조회
625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코로나19 사태에 휘말려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의 외출조차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는 법적 노인이 되고 보니 더욱 집에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래도 바람을 쐬지 않을 수는 없다. 동네에 넓고 깔끔한 카페가 생겼다. 거기 평소 좋아하는 에스프레소의 맛이 그럴듯하다.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미루었던 책을 읽기도 하고, 그동안 거의 실행한 적이 없는 육필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글을 거의 컴퓨터로 썼고 간단한 메모조차 폰의 메모장을 이용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권연대에서 보내오는 수첩을 활용해 쓰다가 빈칸이 채워져 새로운 수첩을 사서 볼펜 등으로 육필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오랜만의 육필 운용은 마치 잃어버린 분신 하나를 찾은 듯 신선했다. 그러던 중 아래의 글을 쓰게 되었다. 자유롭게 마음 이는 대로 쓴 것이니, 주제가 오락가락할 수도 있고, 내용이 그저 직관의 심상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대략 고쳐서 올린다.


2.
<2021년 3월 7일 일요일, Trini에서>


 욕망에 관해서는 생명과 소유 또는 향유와 관련해 제법 오랜 세월 생각해 왔으나 뚜렷하게 그 작동의 얼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밥이 하늘이다.” 김지하 선생의 말이다. 일본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는 ‘직경(直耕)’을 주장했다. 누구건 저 자신이 경작한 밥을 먹어야지, 천황이건 쇼군이건 사무라이건 남이 경작한 밥을 빼앗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인터넷을 통해 그가 쓴 『법세 이야기』를 읽고 있다.


 욕망에 관한 생각을 ‘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생명에 조건을 걸어 욕망을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밥’은 노동의 목적이고, 노동 및 노동의 결과를 상징 · 은유하기도 한다. 그 직접성에서는 생명을 유지 · 강화 · 재생하는 것을 지시할 것이다.


 ‘밥과 일’,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 신약성서의 이야기다. 일은 생산 활동이다. 일의 출발은 생명의 압력을 따르는 수동성을 띠지만, 그 과정은 계획과 효율 그리고 재활성화를 염두에 둔 능동성을 띤다.


 일 즉 노동은 여러 관계를 따른다. 일하는 자와 일의 대상과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관계, 생산과 소비의 효율을 위한 타인들과의 관계, 교환관계를 규정하는 법과 제도와의 관계, 소유와 처분의 관계, 몸과 도구의 관계, 도구와 사물 그리고 생산-소비에서 주어지는 과제와의 관계, 지식과 실행의 관계, 궁극적으로 욕망과 그 충족/결핍의 조건과의 관계 등으로 일에 연관된 관계들은 사뭇 복잡 다양하다.


 욕망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뭇 관계들을 망라하면서 그 맥락과 계기에 따라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워낙 많고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욕망의 문제가 활동 즉 실천 또는 실행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앎과 일’로 달리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에 관해서는 특히 사회개혁 또는 사회혁명에 관련한 담론에서 워낙 많은 논의가 있었다. 추상화해서 보면, 앎은 진(眞) 즉 옮음과 짝하고, 일은 선(善) 즉 좋음과 짝한다. 앞에 따라 지식과 학문이 설립되고, 뒤에 따라 윤리와 도덕 및 경영이 설립된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일 즉 실천(praxis)은 혁명이었다. 혁명은 노동과 욕망을 둘러싼 법적 · 정치적인 체제를 위시해 심지어 사회문화적인 구성을 크게 바꾸는 것이다. 혁명과 비슷한 어감을 띤 것으로 전향(轉向), 전회(轉回), 회심(回心) 등이 있다. 어느 것이건 기본은 역(逆)의 역(易)이다. 회귀가 아니라 창조다. ‘dynamis’ 즉 잠재적인 위력을 창조를 위한 본질로 본다면, 혁명은 그 본질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革命’의 ‘革’ 자가 궁금하다. 인터넷을 찾아본다. <周易>에서 ‘革’은 ‘택화(澤化)’ 즉 불이 연못의 물이 끓도록 하여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풀이됨을 알았다. 흥미롭다. ‘革’ 자는 ‘革帶(혁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짐승의 가죽을 일컫는다. 그런데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의 털을 벗기면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니 ‘革’은 크게 바꾸는 것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혁명적 실천을 위한 지혜를 철학으로 본다면, 그 철학은 결국 욕망(欲)과 행동(行)과 즐김(樂)으로 요약될 것이다.


 좋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하는 데서 출발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어떤 것에 대해 가장 좋은 것을 이데아(idea)라 한 사상은 이성과 지혜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나로서는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속에서도 그렇고 남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문제는 욕망들 사이의 충돌이다. 자장면을 먹고 싶고 짬뽕을 먹고 싶다. 선택해야 한다. 지금 먹고 싶다고 모조리 먹어치우면 나중에 배고픔을 견뎌야 한다. 조절해야 한다. ‘선택과 조절’, 욕망과 실행에서의 기본 원리다. 선택은 당면한 현재의 문제이고, 조절은 미래를 향한 문제다. 선택을 위해서는 사물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조절을 위해서는 욕망의 특질을 알아야 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에 일정한 본질적인 내용이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점차 추상화 · 일반화 · 순화하다 보면 이데아에 이를 것이다. 이데아를 안다는 그 지혜는 결국 욕망과 사물의 본질을 알아 가장 적절한 선택과 조절을 통해, 이른바 탁월성 즉 덕을 이루는 행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앎과 함’의 일치, 즉 흔히 말하는 ‘지행합일’의 덕목이 설립된다.


 사물과 욕망의 관계가 크게 문제로 나서는 경우는 타인이 사물로 등장할 때다. 그 타인 역시 욕망과 행위의 적절함을 위해 선택과 조절을 할 것이고 해야 한다. 나의 선택과 조절이 타인의 선택과 조절과 ‘합(合)’을 맞출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양자가 ‘리(離)’ 또는 ‘충돌’로 나타나면 고약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자장면을 먹을 테니, 너는 짬뽕을 먹어라.” ― “싫어, 나도 자장면을 먹을래.” ― “자장면이 한 그릇밖에 없는데 어쩌지? 나누어 먹으면 어떨까?” ― “싫어, 나누면 내가 배고픈 걸, 아니면 먹어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 때문에 먹는 기분이 나지 않는걸.”


 나와 남의 욕망 관계에서 선택에 따른 충돌을 조절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예사로 자존심이 개입된다. 내가 너보다 적게 먹을 이유가 어디 있어?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 있어? 인정할 수 없어. 네가 뭔데!


 욕망을 둘러싼 나와 타인의 관계는 그저 욕망을 충족할 사물 즉 재화를 향한 것만이 아니다. 그 사물을 매개로 서로의 인격 또는 존재의 높낮이를 가늠하면서, 결국에는 서로를 대상으로 삼는 노릇이다. 동일성이나 유사성보다 차이를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차이를 통해서만 우열의 차별이 가능하고 그 차별을 통해 동물과는 다른 인간 고유의 사회정치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욕망 관계에서 작동하는 차이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라면, 즉 서로 질이 다른 대상을 욕망한다면, 선택도 수월해지고 조절도 쉽다. 특질에서의 종류가 다르니 굳이 비교우위의 결판을 내야 할 까닭도 없다.


 그런데 묘한 일은 나도 너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의 전이(轉移)다. “네가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하겠어. 네가 누리는 것을 나도 누려야 하겠어.”라는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지는 전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경향 내지는 습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욕망 전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불안이지 싶다. 귀하다고 여겨지겠지만 남은 가지고 있는 무엇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남이 자신이 소유한 그것으로 나를 무시하고 억압하려 하고 심지어 내가 가진 것마저 빼앗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가 작동하는 데서 ‘욕망 전이’가 생겨나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협책이 등장했다. 내가 가진 것을 줄 테니 네가 가진 것을 나에게 줘! ‘교환’이다. 교환은 선택과 조절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기교다. 과연 그럴까? 선택과 조절에서 충돌을 완화하고자 고안한 교환이 오히려 선택과 조절에 영향을 미쳐 큰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렇게나 교환하지 않을뿐더러, 교환의 편리를 추구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기가 막힌 기교를 생각해 발휘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교환관계는 순식간에 확산해 모두와 모두의 교환관계가 되고, 거기에 나와 모두의 관계가 아울러 자리를 잡는다. 모두가 모두를 대상으로 직간접적인 교환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럴 때, 당연히 교환의 보편적인 척도가 요구된다. 교환하고자 서로가 내놓은 재화 사이에 교환 비율을 조절해서 손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손쉽게 선택해서 효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교환의 수단이자 척도로 기능하는 화폐 즉 돈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화폐를 통한 선택과 조절에 따라 시간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교환에서 재화 즉 내가 가진 물건이나 노동력을 주고 화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화폐의 선택은 재화의 선택이 아니다. 돈을 먹고 마시고 입을 수는 없다. 재화를 주고 화폐를 선택한 것은 일단 아무것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뤄지는 교환에서 화폐의 선택은 필수적이다. 지갑 속의 화폐는 당장 어느 재화를 소비하고 향유할 것인가를 미결정으로 미룬 시간의 양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화폐는 알 수 없는 미래에 재화와 교환하리라 작정한다는 증표다. 이에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늘려 내 삶의 구체적인 시간을 재구성한다. 과거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가 없듯이, 미래와 결합하지 않은 현재는 없다. 화폐가 쌓이면 쌓일수록 미래의 시간이 늘어나 현재에 결합한다. 여기에 화폐의 또 하나의 본질이 있다. 화폐가 제공하는 그 미결정의 미래는 현재에서는 순전히 잠재적인 것일 뿐 현행의 충족이 아니다. 화폐는 미래의 시간을 영원하게 만들고, 그 영원성을 현재에 결합함으로써 현재가 마치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많이 소유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착각은 더욱 굳건해진다.



사진 출처 - freepik


 이에 화폐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각종 이미지와 상징을 가능케 한다. 기호학적인 용어를 빌어 말하면, 그리하여 기의(記意)가 사라지고 없는 기표(記標)만의 시간과 그에 따른 세계가 대대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불안은 미래에서 온다. 미래의 시간이 짧을수록 불안의 양은 커진다. 불치병으로 곧 죽을 것 같을 때, 불안은 극대화된다. 돈을 많이 쌓아두고 있으면 불안의 양이 적어지는 것은 돈이 미래를 늘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가상적이기 때문에, 불안의 양이 줄어드는 것 역시 가상적이고, 실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한다. 거꾸로 보면, 돈을 통해 불안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실제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는 자들의 불안은 강박이라 할 정도로 강하다. “너의 부가 쌓이면 쌓일수록 너의 존재는 빈곤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다. 여기에서 ‘존재의 빈곤’은 실질적인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현재의 삶에서 제대로 된 창조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할 수 있다.


 화폐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너도나도 미래의 가상적인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빠져든다. 욕망은 미래에서 열리는 가상의 폭과 깊이를 향해 힘을 발휘한다. 욕망이 영원한 시간 즉 불멸을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멸에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화폐는 가상적인 불멸을 약속한다. 사탕발림의 이 약속에 모두가 미혹되어 넘어져 자신의 존재를 절뚝거린다.


 하지만, 화폐를 둘러싼 욕망의 분출과 실행의 길은 누구건 쉽게 비켜 갈 수 없다. 그것은 앞서 말한바, 모두가 모두를 교환하는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차이와 그에 따른 차별, 그 차별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화폐를 통해 실현 · 충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화폐를 통한 인정 투쟁이 벌어진다. 말하자면, 화폐가 제공하는 가상적인 불멸의 시간 속에 뭇 인간들이 들끓으면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이 생겨난다. 긴 미래의 시간을 확보한 자가 짧은 미래의 시간을 가졌을 뿐인 자를 지배한다. 화폐가 개입한 상태에서 권력은 가상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다. 그런데 그 가상은 이미 모든 사람을 휘어잡고서 오히려 실재로서 다가와 힘을 발휘한다. 권력은 가상적 실재를 놓고서 진정한 실재인 양 착각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비록 기술이라는 말을 예술로 달리 번역하긴 했지만, 어쨌든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돈은 길고 인생은 짧다.” 또는 “권력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했다고 해보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첫눈에 벌써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시간은 돈이다.”라는 항간의 말을 “돈은 시간이다.”라는 말로 바꾸었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맞는 말 같다. “내가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어.”라는 말을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라고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 그러므로 나는 시간이 풍부해.”라고 말한다면, 제법 맞아들어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돈을 향한 욕망, 즉 불멸을 향한 욕망, 그 가상적인 환상이 마치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것 같다.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