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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21세기의 불안, 신의 위기(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1-20 16:04
조회
715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2021년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제 21세기도 중반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이끄는 위력은 단연 A.I.를 중심으로 한 고도과학기술의 가속하는 발달이다. 빅 데이터 활용에 따라 각자의 프라이버시의 내밀함이 증발하고, 그 대신 스마트폰이 마치 각자의 기계적인 영혼인 양 위력을 발휘한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현실화되는가 하면, 구글을 중심으로 영생불사를 향한 기술 개발이 박차를 가한다는 소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인간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매스컴을 타고 간간이 흘러나온다. 무엇보다 A.I.로 무장한 알파고가 이세돌 천재 기사에게 전적인 승리를 거두고 곧이어 강력한 딥러닝으로 무장한 알파고 제로가 알파고와 바둑을 두어 백전백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A.I. 기술 기반의 범용 로봇이 인간을 넘어서서 대체해버리거나 적어도 인간을 노예로 삼거나 하는 사태가 현재로서는 터무니없지만 머지않은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라는 불안이 암암리에 확산하고 있다. 2000년에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자문 위원회를 이끌던 빌 조이가 오래 가지 않아 인간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한 예측이 결국 현실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인류 전체의 불안이 암암리에 확산하는 것이다. 이에 뇌의 비밀을 밝혀 지능의 정체를 알아 기계적으로 전용하고자 하는 ‘뇌 신경 인지과학’이 첨단의 복합적인 융합학문으로 떠오르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생물학적인 기계 인간인 사이보그 인간을 모델로 해서 ‘포스트 휴먼’ 담론이 인간 존재에 관한 첨단 담론인 양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어쩌면 역사상 최대의 전 지구적 역병으로 기록될 것 같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국가들 사이에 각종 장벽이 건설되고, 국가 내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활동 시간의 강한 제한이라는 방역 정책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분리와 고립이 당연한 일상인 양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의 감정이 무기력의 우울인 ‘코로나 블루’에다 방향과 이유가 없는 분노인 ‘코로나 레드’가 겹친 상태로 치닫고 있다. 입고 먹는 데 필요한 것들이 비대면 택배로 공급된다. 하지만, 먹고 입는 것만으로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직접 만나 온몸으로 복합적인 감각을 주고받을 때, 그 만남을 바탕으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공유할 때,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문화생활을 구체적으로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런 만큼 인간다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대면 접촉에 따른 이러한 인간됨의 구체적인 실현의 영역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말 그대로 붕괴하는 중인 것이다. 물론 이삼년 지나면 예전의 정상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붕괴한 인간 됨은 쉽게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고 난 뒤의 사회 양식을 뜻할 수도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진정되고 난 뒤의 사회 양식을 뜻할 수도 있다. 후자의 뜻으로 본 ‘포스트 코로나’는 대대적인 생명 위협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집단 트라우마를 형성함으로써 사람들의 감정과 사유 그리고 행동을 새롭게 가져가도록 할 것이다. 그 아주 가까운 미래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이때를 떼돈을 벌 기회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전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였을까, 세계 유수의 제약회사들은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WHO를 비롯한 각국의 백신 허가 관청에서는 2상이니 3상이니 하는 검증 절차를 간소화해서라도 접종 허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과 소련에서 먼저 접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미국과 EU를 비롯한 선진국에서 접종이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심지어 백신 접종 후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비롯해 백신 접종의 각종 부작용에 따른 불안과 공포가 확산하면서 백신 접종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상당 정도에 이른다는 여론 조사의 결과가 보도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백신과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치료제의 개발과 같은 의료 과학기술 말고는 확실한 해결책이 없다.

 이 와중에, 빅 데이터를 장악하고서 세계를 호령하는 몇몇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들이 백신 속에 극미한 디지털 장치를 숨겨 넣어 전세계 사람들을 노예화하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으니 백신 접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퍼뜨리는 변종 기독교 집단이 나타나고, 그 일부의 극단주의자가 미 의회를 공격해 들어가 의기양양 파안대소를 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무슨 ‘BTJ ― back to Jerusalem ― 열방 센터’인가 하는 제정신을 잃어버린 기묘한 기독교 선교집단이 이와 연결된 모양이다. 작년에는 ‘신천지’니 뭐니 하는 집단 광기의 기독교 집단이 코로나19 확산에 불을 붙여 문제가 되고, 정체불명의 인물인 ‘전광훈’을 중심으로 한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니 ‘사랑제일교회’니 해서 반(反)민주정부 변종 기독교 세력들이 코로나19 방역에 역행하여 문제를 일으키더니, 새해 들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지를 회복하자는 둥, 과거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온갖 잔인무도한 폭력적인 사태를 일으켰던 십자군 운동을 되살리자는 둥, 시대착오적인, 아니 21세기 불안과 공포를 역용한 종말론적인 변종 기독교 광신 집단이 전면에 드러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러한 변종 기독교 바이러스가 나타나는가? 모든 일에 대해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수백 년이 되었고, 오늘날 그 정점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근대과학혁명이 일어나 기계론적인 우주론이 확립됨으로써 전 우주의 운행에 신의 의지와 섭리가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신은 우주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19세기 진화론과 유물론이 발달하여 지성의 세계를 장악하다시피 하자, 신은 생명 일반의 영역에서 쫓겨났다. 그런가 하면, 이와 같은 세기에 새로운 기계기술과 산업 경영의 획기적인 발명에 힘입어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자본이 인간 욕망과 감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행동을 장악하게 되고, 20세기 들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홀로코스트를 수반한 양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대 악이 이어지자, 이제 신은 인간의 삶으로부터도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히틀러 나치가 ‘유대인 소탕’을 목표로 하루에 몇천명씩 독가스실로 보내 홀로코스트,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할 때, 곧 희생당할 누군가가 “야곱의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하고 외쳤다고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신의 침묵이다. 얼마 동안에는 신의 침묵을 계시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지속하면 신의 침묵은 신의 무능력으로 해석되고 급기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그런가 하면,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앞서 기술한 것처럼, 첨단과학기술들이 신의 고유한 영역을 최대한으로 잠식하고 있다. 진화론을 원용하기도 하면서 이루어지는 유전공학의 발달은 생명의 유물론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인간을 비롯한 생명 창조의 영역을 장악하는 중이다. 인공수정에 이어 유전공학의 발달로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 복제가 실현되고, 이에 게놈 구조가 똑같은 개개 인간의 복제가 원리상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A.I.로봇 기술의 발달로 신이 창조한 최고의 창작물인 인간 존재의 탁월성을 뒤로 물리칠 범용 A.I. 기계 생명체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고가 예사로 매스컴을 타고 있고, 이러한 A.I. 기계 생명체를 만드는 기술공학자는 자신이 혹시 신이 아닌가, 하는 심중한 착각을 할 정도다. 이 고도과학기술들이 인간 삶을 근본에서부터 결정하기 시작하자, 그나마 형이상학적-신학적으로 남아있던 인간의 영혼마저 기계적인 영혼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으면서 이제 신은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헐벗은 ‘거지’ 신세가 된 셈이다. 신이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와 함께 특히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기독교 자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전세계적으로 기독교는 겉으로 보기에 건재하다. 모르긴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한 자들의 장례식에서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맞은편에 신부나 목사가 망자가 내세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이같이 아직 기독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전쟁과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정확하게 알리고 드러내는 위력이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사멸과 무의미에 대한 확신에 기반을 두고서 그 사멸과 무의미를 넘어섰으면 하는 실현 불가능한 바람에 상상이 결합해 생겨난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구원과 행복뿐만 아니라 심판과 공포와 저주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신이 자리를 잡고서 가상적인 지상 최대 최고의 주권적인 위력을 발휘해 온 것이다. 방역을 방해하는 광화문 집회에서 “죽음은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인 거야!”라고 떠들어대는 ‘전광훈’의 말이 이를 잘 나타낸다. 과연 전광훈만일까? 죽어도 좋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야말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진정한 구원의 백신이고, 그 구원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념을 믿어야 한다고 기독교도 일반이 주장할 것이고, 그 믿음을 최면을 걸어서라도 강화하기 위해 기도를 올린 것이다.

 결국, 문제는 죽음이다. 그런데 인간 개체의 복제 기술을 숨긴 상태로 영생불사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많은 자본을 투자해 그 결과가 상당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면, 인간들은 과연 신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발버둥 치듯 돈을 벌어 돈으로 살 수 있는 기술에 의한 구원을 청할 것인가.

 이전에도 특히 대대적인 전쟁이나 대역병으로 사회정치적인 대혼란이 일어나 신이 위기에 처하면, 온갖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변종 기독교 집단들이 생겨나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앞서 기술한 것처럼, 21세기에 겪는 신의 위기는 이전의 위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백신 약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한 감각-통신의 디지털 기계를 숨겨 백신을 맞은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세계 지배 세력의 음모를 운운하는 신종의 변종 기독교 바이러스의 출현은 신의 절대적인 위기와 그에 따른 기독교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 해답은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발달시켜 온 우리 인간의 이성을 앞세워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이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성은 종교건 기술자본이건 인간의 죽음을 볼모로 대중을 선동하여 무지와 무명(無明)을 강요하는 ‘사탕발림’을 내세운 권력의 욕망을 폭로할 수 있고 분쇄하는 최소한의 인간 능력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