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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재난지원금과 지역화폐(이재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7-15 11:55
조회
689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코로나19로 인한 골목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으로 급격하게 나빠진 지역경제가 그나마 버티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런데 재난지원금이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의 법률상 명칭)으로도 지급되다보니 지자체 지역화폐 담당자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몇 달 동안 왜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냐는 항의를 많이 받았다. 왜 우리 가게는 재난지원금으로 받은 지역화폐를 쓰지 못하게 하느냐는 가게 점주들의 민원은 더 많았다. TV광고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점들이다.


 ‘침체된 지역 골목상권에 온기를 불어넣고자 대형마트, 대기업 프랜차이즈 등이 아닌 전통시장, 소상공·자영업 가게에서만 쓸 수 있습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지역에서 함께 살기위한 정책임을 이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상생을 강조하며 양지를 구하면 수긍하는 점주들이 많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는 점주들이 더 많다는 게 함정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반발이 ‘우리도 소상공인인데!’라는 항변이다. 그런데 참 소상공인의 범주가 너무 크다. 소상공인법에 따르면 소매업의 소상인 기준은 매출 50억 이하이다. 골목경제의 현실을 반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정한 기준이 있다.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제한기업의 계열사 및 업체는 지역화폐 도입 목적과 의미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고 유통산업발전법에 가맹점 제한규정을 둔 것이다.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이다. 가게를 내고 싶어도 상당한 재력이 없는 한 내기 힘든 곳들이다. 멤버십카드로 수 십군데 이상 제휴점에서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업체들이다.


 ‘코로나19 정국에서 모든 곳이 힘드니 특수한 상황임을 고려해서 지역화폐 가맹점으로 받아야 하지 않냐’는 요구도 나온다. 그렇다. 지금 안 힘든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동네가게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곳 들이다. 또한 업종 내 시장 지배적 업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이들 업체가 ‘이번 기회에’ 지역화폐 가맹점이 된다면 지역화폐 소비의 쏠림현상은 공고화 될 것이 자명하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이해를 구하면서 설득했지만 점점 압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은 프랜차이즈 점주들끼리 단체 민원을 넣기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통로를 통해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시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단결력과 힘이었다.


 ‘재난자본주의’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19를 빌미로 원격진료 등 그동안 숨죽이던 자본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상황이 어쩌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프랜차이즈들은 재난기본소득 지급 이전에는 지역화폐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민원이 온 업체는 다양했다. 의식주를 망라해 골목경제를 구성한다고 보기 힘든 모든 곳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가게도 위치는 골목에 있다’고 목청 높여 주장하신 분도 있었다. 다른 결에서 특이했던 건 유흥주점에서 온 전화였다. 가게를 내놓아도 나가지도 않는데 술장사 한다고 너무 괄시하는 거 아니냐면서 사장님은 통곡을 했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더 기억에 남는 건 국내에서 가장 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온 전화였다. 다짜고짜 ‘000000부 협조 공문이 갈 텐데, 우리는 언제 가맹점이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일단 000000부 공문은 아직까지도 오지 않았다. 완곡하게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기 위해 도입한 지역화폐의 의미를 알려드리고 역제안을 던졌다. 가맹점은 되기 어렵지만 대신 지역 사회공헌 차원에서 영화 상영 전 지역화폐 광고를 해 줄 수 없겠냐고.


 그런데 진짜 그런 경우가 있었다. 시흥화폐 시루를 도입하기 전, 또 다른 경쟁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먼저 지역화폐의 취지에 동감한다며 몇 달 간 홍보영상을 틀어줬었다. 비슷한 예로 지역의 한 대형마트에서는 영업장 내부에서 지역화폐 홍보 전단지를 돌리는 것을 흔쾌히 허락한 경우도 있었다. ‘같이 살자’에 동의한 통 큰 결단이 고마웠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어쨌건 지역화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지급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다보니 생긴 일들이다. 엄청나게 풀린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사실 카드를 선택한 국민이 훨씬 많았다) 받지 못하는 대기업 프랜차이즈점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역화폐를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소비쿠폰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지역화폐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의 프랜차이즈 공세에 허물어져 가는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소비의 부 절반이 서울·수도권으로 쏠리는 한국경제의 고질병인 역외유출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한 방책이다. 소비자는 발행규모 세계 1~2위인 후불제 카드소비에서 벗어나 할인혜택을 받으며 선구매한 지역화폐로 나와 지역을 생각하는 계획적 소비를 할 수 있다.


 지역화폐가 지역화폐답기 위해서는 가맹점 기준이 핵심이다. 지역 내 모든 업체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기존의 소비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역화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몰리던 발길을 동네 가게로 돌리기 위해 세금을 들여 협력적 소비, 지역 순환경제를 유도하는 시스템이다.


 최근 수 년 동안 급속하게 성장한 지역화폐를 만능열쇠로 여기는 인식이 있다. 코로나19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넘기면 많은 거품들이 사그라질 것이다. 지역화폐 역시 지금 방향을 잃고 엇나가다보면 거품과 함께 사그라질 수도 있다. 기우로 그치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