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춘재, 자백, 라포, 인간적 면담(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1-15 18:08
조회
1386

이윤/ 경찰관


 DNA 대조에 의해 30년 전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이춘재라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춘재의 DNA가 당시 3건(5, 7, 9차 사건)의 현장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였다. 이에 경찰은 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춘재를 상대로 면담하여 14건의 살인사건과 30건의 성범죄에 대한 자백을 받았다.


 DNA가 일치해도 자백은 필요하다. DNA 증거는 범행현장에 그 사람이 있었다거나 범행과 관련된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했음을 입증하는 간접증거일 뿐 범행의 동기, 고의, 방법, 범행 전후의 행적까지 알려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행위자나 목격자의 기억에 의한 정확하고 진실한 진술이 필요하다.


 이춘재는 계속 범인이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9차에 걸친 면담 끝에 모두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하였다. 언론에서는 어떻게 이춘재의 자백을 이끌어냈는지에 관심을 보였고, 일부 전문가들은 프로파일러들의 ‘라포형성’이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라포형성(rapport building)’은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대단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에서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이나 신뢰관계’를 의미하는 라포형성은 교육이나 상담, 그 밖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기본이고 필수이다. 라포가 형성되면 긴장과 불안이 감소하고 의사소통의 장벽이 제거되기 때문에 정확하고 풍부한 기억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범죄처럼 남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까지 말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라포를 형성하는 구체적 방법은 언어적/비언어적 경청, 공감하기, 동작 따라하기(미러링), 상대 배려하기 등이 있다. 이런 방법들은 기법이라기보다는 태도에 더 가깝다.


 ‘겨우 이런 것으로 자백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당연하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수사면담 교육을 받은 많은 수사관들이 라포라는 생소한 외국어와, 조사할 때 꼭 라포를 형성하라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의 실증연구에 의하면, (고문이 없다는 전제하에) 라포형성이 포함된 인간적(humanitarian) 면담방법이 많이 사용될수록 자백 가능성이 높아지고, 적을수록 자백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한다. 또 범죄자의 60%는 다른 기술 없이 라포형성만 잘 되어도 자백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물론 라포형성이 된 모든 사례에서 꼭 자백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라포형성은 자백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춘재와의 사이에 라포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백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하고 핵심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진 출처 - 구글


 1990년대 이후 심리학자들은 수사 피의자를 상대로 범죄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신문’이나 ‘조사’ ・ ‘취조’라는 용어보다 ‘수사면담(investigative interview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 세계의 수사면담기법들 모두 라포형성을 강조한다. 인간적 면담방법에 해당하는 인지면담, 영국의 PEACE 모델, 스웨덴의 SUE(전략적 증거 사용), 노르웨이의 TIM(전략적 면담 모델), 네덜란드의 GIS(일반적 면담 전략)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강압적 면담방법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리드(Reid) 테크닉도 면담을 시작할 때부터 피면담자와의 사이에 라포를 형성하라고 한다.


 만일 화성 8차 사건 수사관들이 라포형성에 의한 인간적 면담방법을 알았더라면 무고한 윤 모 씨가 허위자백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억울한 옥살이도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한국 경찰도 2007년부터 수사연수원에 ‘수사면담 전문과정’을 신설하여 수사관들에게 라포형성을 포함한 인간적 면담방법을 교육시키고 있다. 문제는 교육받은 수사관의 수가 너무 적어서 당시에도 1년에 280명뿐이었지만, 최근에는 1년 동안 100여명(1회 35명씩 1년 3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 수사경찰관의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많은 수사관들이 피의자와 라포형성을 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꾸짖고, 호통치고, 비난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창피 주는 방법으로 상대를 굴복시킨 수사를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수사를 포함한 모든 경찰활동은 사람을 상대로 한다. 현장에서 분노, 불안, 두려움의 정서가 각성된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신고나 업무 관련 대화를 하기 전에 라포를 형성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더욱 수월해질 것이고, 경찰관에 대한 불신도 줄어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라포형성을 하면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라포형성과 인간적 면담에 대해 영국처럼 수사 분야를 넘어 모든 경찰관에게 교육·훈련시킨다면, 인권경찰, 유능한 경찰, 공정한 경찰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