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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 55주년을 회고(윤영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2-26 15:41
조회
966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내 80평생에 잊을 수 없는 55년 전, 1965년 1월초, 군 말년에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해외파병요원 지원자 모집”이었다. 파병될 나라는 전운이 감도는 월남이라 했다. 파병지원자 신청 마감은 1월 20일까지였다.


 당시 나는 원주 제235부대 서무계에 있었고 전역 3개월을 앞둔 육군병장이었다. 2년 전에 입대하여 오직 제대할 날만을 달력에서 하루씩 지워가고 있었다. 전통 내용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전쟁지역이기에 전사가 속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는가?


 헌데 슬그머니 모험적 마음들이었다. 제대하면 복학해 공부할 것이다. 9살에 6.25전쟁을 목도하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란 영화도 보았다. ‘전쟁과 평화’를 실제 경험할 수 있기에, 나에게 체험의 기회라 생각했었다.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최초의 해외 파견으로, 어떤 일이든 최초라는 단어는 호감이 간다. 그런데 신원조회가 걱정이었다. 해방공간에서 맏형이 건준과 통일운동으로 재판도 없이 죽어갔었다. 의용군 둘째형과 부친도 부역자였기에 신원조회가 문제였다.


 이번 신원조회를 만약 통과한다면 걱정을 덜 수도 있었다. 전언통신문을 정리하여 부대장에 올리고 부대원에 공람을 했다. 130명중에 단 2명만이 지원 했다. 그런데 부대장과 군종신부는 나의 지원 사실을 철회하라고 했다. 지금 월남 사이공 수도가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를 위험한 곳이기에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나는 한번 결심한 이상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단 지원자 중심으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나는 서무사병계 직무를 맡았다. 인사계 최 상사와 강 부대장과 함께했다. 양평으로 이동하여 부대편성과 참전교육을 받을 때였다. 1군사령부 인사참모 김 중령이 찾아와 지원을 철회하라고 했다. 부모님과 할머님이 파병사실을 아시고는 지인을 통해 철회부탁을 한 것이다.


 군청에 다니던 맏형이 22살에 사상범으로 죽고, 둘째형이 참전으로 부상당했기에 셋째인 나를 죽음의 전쟁터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결심을 번복 않는다,”고 단호하게 의견을 말하니, 인사참모도 “가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고집부리나. 그러나 그리 결심이 강하니 어쩔 수 없네.”하면서 돌아갔다.


 걱정이던 신원조회는 어인 일인지 통과되었다. 현리에서 2천명이 결단식에 2월 7일 서울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한국군최초해외파견’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국민환송식을 가족과 시민도 함께 했다. 전선 없는 월남전이기에 참전자들에게 특별히 범국민적 성대한 환송식이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곳곳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2월 11일 부산 제3부두에서 해군엘에스티함대에 탑선한 선발대 600명이 주야 2주간 공해를 항해하여 베트남 붕타우에 도착했다. 두 달 전 와 있던, 이동외교병원 간호장교와 요원들이 함정가까이 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5일 만에 월남의 수도 사이공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월남의 정부수반인 판칵수와 국방장관 티우 중장, 키 공군사령관과 실세인 칸 소장도 환영식에 함께해 비둘기부대원 선발대 600명을 환영해 주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26킬로 떨어진 비엔호아 지안에 도착했다. 부대 2킬로 반경이나 된 부대막사에서 우리 전우들은 첫날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본대 1,400명이 ‘유에스메이카’호로 도착해 도합 2천명 부대원이 함께했다. 첫날 부대본부 연병장에서 조문환 준장(단장)이 훈시를 했다. 경례는 “경계철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조 준장은 “이곳은 한국이 아닌 우방국이다. 내나라 수호한 것도 아니고 타국에서 헛되이 죽어갈 수는 없다”며 강하고 진한 훈시를 했다.


 조문환 장군의 훈시에 전부대원들은 숙연했다. 전선 없는 전쟁터인 월남 현지는 당시 제네바협정에 의거 17도선, 북은 월맹, 남은 월남이었다. 프랑스와 80년 전쟁에 항쟁한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요원)이 월남의 3분의1을 관할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가 주둔 후, 첫 교전은 4월 2일, 본대에 도착한지 7일만이었다. 그날 “또순이”란 우리 영화를 상영해 이국의 향수를 달래주었었다. 밤10시에 전원취침에 들어갔는데 나는 당직을 맡고 있어 잠에 들지 않았었다. 11시에 베트콩 2개 중대는 비둘기부대 단 본부를 겨냥한 박격포탄 80여발을 선제공격하고 부대에 침공을 했다.


 본부 가까이 포탄이 떨어져 나는 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처음 겪는 실제전쟁 상황이었다. 베트콩의 포탄에 바로 응사하고 조명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요란했다. 어쩌면 교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부 전우들은 우왕좌왕 오락가락 했다.


 1시간여 교전 끝에 아군 8명의 중경상자가 붕타우로 후송되었다. 베트콩 1명 사망, 수십 명 중상, 총 5자루 노획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날이 ‘한국군 해외파견 최초 교전 승리’했다고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이후 한국전투부대파병을 사전에 차단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해 8월과 9월에 전투부대 맹호사단과 청룡여단과 백마사단이 퀴논과 나트란 캄란에 주둔했다. 10월에 주로 월남군과 미군이 함께한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했었다. 미숙한 정글전이기에 연전연패로 전우 수백 명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로 군종신부와 함께 탄산누트공항 영안실에서 전사한 맹호와 귀신 잡는다는 청룡전우 영혼에 미사를 올리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말고 살아가자고 했는데... 죽음은 일부 지휘관의 공명심과 무모한 소탕작전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 슬픈 사실은 우리 전우들이 벌인 베트콩 소탕작전에서 월남 민간인을 첩자로 여겨 우리 전사자 숫자와 같은 수천여 명이 희생된 것이다. 한 ․ 베트남 수교 후에 김, 노 대통령이 방문하여 특별히 사과는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에서도 미군이 우리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과 같은 처지로 인한 죽음이었는데 과연 쉽게 잊히겠는가?


 9년 동안 한국군 33만 명이 파병되고 6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고엽제 유사환자까지 수만 여명에 이르렀다. 나는 베트남에 파견 온 것에 대해 남루한 후회를 했다. 내나라 통일도 못하면서, 월남의 민족해방통일을 방해하는 용병으로 지원해 파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오래전 프랑스와의 80년 전쟁을 이겨내고 제네바협정으로 17도선 남북으로 나뉘어 다시 미국을 비롯한 한국 필리핀 여러 나라 외세가 참전해 전쟁이었다. 진정 월남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공산 사회주의도 자본 민주주의도 싫다. 오직 외세의 간섭 없는, 전쟁 없는 베트남 민족으로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미군은 한국군 10년 파병에 전투수당 기타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건은 빠져 있었다. 그간에 수차례 고엽제 보상을 미국법원에 제기했으나 64년 한미월남파견각서에 들어있지 않다며 패소하였다. 내 참전전우 수 명도 고엽제 환자로, 또는 유사환자로 치료 중이다.


 미국이 월남을 동남아 기지로 삼았기에 발생한 과다 군사비용과 인명손실이었다. 우리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한때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를 이기고 73년에는 세계강국인 미국을 이겨내고 남북베트남의 민족 통일을 이루어 냈었다. 이제는 외세도 전쟁도 없는 평화를 얻고 있었다. 도이모이 정책으로 날로 성장하는 베트남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참전 이후 항상 마음 한 가운데 아픔이었는데, 다행이도 우리와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하는 수교국이 되었다. 나는 수교된 후에 3차례나 참전 전우들과 하노이와 호치민시, 붕타우, 지안, 나트란, 캄란 등을 방문하면서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베트남을 보면서 고맙기도 하다. 특히 근간에 우리나라 축구 박 감독이 베트남의 국가대표 감독으로 영웅적 칭송을 받고 있어 한 베트남 선린관계에 마치 지난 용병의 아픔을 덜어 주는 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자주 국립묘지를 찾아 전우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또한 고, 조문환 장군 묘소에서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훈시를 기억한다. 지난번 운명한 채명신 주월 한국사령관이, 장군 묘를 사양하고 사병묘소에 묻혀, 사병과 함께하는 부하사랑 영혼이기에 명복을 빌었다. 필자 또한 살아서 이글을 쓰고 있어 감회가 깊다.


 베트남 참전 반백년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호치민 같은 민족지도자가 있었기에 미국을 이겨냈다. 우리는 언제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패권에서 벗어날까. 수치스러운 지구상 마지막 분단 70년, 한반도 주변 강국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양상이 아닌, 새우가 주름잡는 우리의 소원인 남북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 윤영전 : 작가(수필, 소설, 서예 칼럼니스트) 아호:九巖. 당호:傳孝堂. 한국작가회의 소설회원
               수필집 (도라산의 봄) 소설집 (못다핀 꽃) 에세이집 (평화, 그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 (인연, 아름다운 만남) 수필선 (강물은 흐른다) 희수기념문집 발간
               평화통일 삶을 살다(평화연대문집) 구암애창가곡집(CD) 등 다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