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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발자크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저널리즘에 대한 짧은 생각들(권용선)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0-23 17:56
조회
168

권용선/ 수유너머 104 연구원


 그는 말했다. “예전에 정치 저널리스트라는 명칭은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흐, 보댕, 몽테스키외, 블랙스톤, 벤담, 마블리, 사바리, 아담 스미스, 루소와 같은 위대한 저술가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어설픈 저술가들을 지칭하고 있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예언자이며, 사상적인 선지자였던 정치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깃대가 되어버렸다.”(발자크, 「저널리즘」 중에서.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그의 시대에 신문기자는 모두 정치 저널리스트에 속했다. 이들 조직은 “기사는 한 문장도 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관여하는” 사장, 주필, 사주, 편집장과 무대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너가수처럼 행동하는 논설위원, 연극의 조연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기자, 편집장이나 사주의 명령에 따라 ‘자크의 요리사’처럼 짧은 기사들을 이리저리 오려붙이는 편집기자, 의원들을 성공시키거나 명성을 실추시키며 정치드라마를 연출하는 국회 출입기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독자를 잡기 위해 각양각색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던 크고 작은 사이즈의 신문, 잡지, 팸플릿들, “먼저 때려라! 변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구호를 공유했던 정치 저널리즘의 행동양식, 발자크의 눈에 비친 루이 필립 시대의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세부만 살짝 바꾼다면, 같은 방식으로 우리시대의 저널리즘에 대해 풍자하거나 냉소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법무부 장관 자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끓었던 지난 시간 동안 ‘검찰개혁’이라는 구호로 수렴된 ‘사법개혁’의 절박함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국사회가 지닌 온갖 ‘개혁할 거리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너무 많은 이슈들이 한꺼번에 장관후보자를 매개로 쏟아져 나왔고, 속보와 단독 타이틀을 단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법적 판단의 층위와 도덕적 기대의 차원, 사실과 전언과 정황은 구분되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지는 기사들 대부분은 사건 (혹은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시간을 독자들에게 배려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선결정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기사들을 취합함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사실과 정의의 서사를 스스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미디어가 되거나 ‘다른’ 미디어의 목소리를 찾기도 했다. 전선은 복잡해졌고, 평소라면 선명한 대립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적어도 언어적 차원에서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었지만, 검찰과 언론의 공조로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 유죄추정의 분위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레임은 법적인 판단과 근거 이전에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짜였고, 여기에 장관 후보의 정무 감각이나 업무 수행능력에 대한 토론과 판단은 주변화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팩트가 아닌 뉘앙스”(권석천, 「검찰청의 편집자들」 중에서)라는 비유는 단순한 비유 이상이었던 셈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있었던 기자들과 장관 후보의 간담회, 비슷한 질문들에 대한 비슷한 답변과 사과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장시간 반복되었던 기이한 풍경이 여전히 씁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자들 누구도 현장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스마트 폰에 적혀 있는 질문들을 ‘읽고’ 있었다. 누가 저들에게 질문을 지시하는 걸까, 모든 언론사들이 간담회장을 수습기자들의 필드워크 장소로 활용하기로 약속이나 한 걸까, 누구든 핵심을 찌르는 묵직한 질문 하나쯤 던져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었다. 기자들은 당당해보이지도, 날렵해보이지도, 영리해보이지도, 사려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저들은 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일전에 만났던 한 주간지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그래도 내가 쓴 기사랑 타사 기자들이 쓴 걸 크로스 체킹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속보, 단독 기사들이 매분매초 튀어나온다고요. 머뭇거리는 순간 도태될지도 몰라요. 물론, 아주 가끔 정말 제대로 된 기사들이 나오기도 해요. 하지만 포털 메인에는 이런 양질의 기사들이 노출될 확률이 제로예요. 절대로 노출되지 않아요.” 사정이 이러니 기자들만 탓할 수도 없다. 광고주를 의식하며 감각적인 제목으로 클릭수를 늘리려는 언론의 욕망과 가벼운 내용으로 최대치의 정보를 얻으려는 유저들의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디지털 환경은 이제 저널리즘 환경의 상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발행인 설즈버거의 말처럼, 포털 사이트가 플랫폼이 되는 언론 환경은 뉴스를 저널리즘이 아니라 단순 콘텐츠 수준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지식과 통찰과 결기가 느껴지는 제대로 된 뉴스들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동료, 후배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괴로움’이 없어요. 어려운 시대 특히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인 기자들이 괴로워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보도 내용과 전망, 예측이 수천 번, 수만 번 틀렸어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핵심은 어떤 것인지 천착하려는 각고의 노력과 의식이 없습니다. 이익집단의 파수병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그야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 맞는 인내와 각오, 그리고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기획대담; 리영희-김주언」<미디어오늘> 1997. 2. 3) 발자크의 시대로부터 180여 년, 리영희 선생이 활동했던 ‘검열’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수십여 년, 왜 저널리즘에 대한 그들의 걱정이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