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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경찰관 노조(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9-23 18:47
조회
2801

이 윤/ 경찰관


 한국에는 경찰관 노동조합이 없다. 경찰관 노조라고? 사람들에게 이건 착한 악마라거나 날씬한 돼지만큼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지금까지 경찰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대기업 사주나 정권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농성 중인 근로자들의 파업현장에 투입되어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체포하였으며, 노조 지휘부들을 수배하고 검거하였다. 7,80년대에 노동운동가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고, 그들을 검거하여 수사하는 것도 호국경찰을 표방하는 경찰의 일 중 하나였다. 2009년 쌍용차 파업 현장에 대한 경찰의 진압, 2019년 민주노총의 국회 앞 집회 도중 차로 점거 및 경찰관 폭행을 이유로 위원장 포함 3명 구속 등 노조와 경찰이 서로 대립하는 입장인 것은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조 잡는 경찰이 자신들의 노조를 만들어 권익을 지키겠다고 하면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이 음주운전을 하겠다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찰조직에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가당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경찰관들에게 노조가 필요하다.


 경찰관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들에게는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중앙집권적 조직체계 내에서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정치적으로 편향되거나 이해관계 일방 당사자에게만 유리한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기하여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용감한 누군가가 지시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징계에 이은 소송 등 장기간의 외로운 싸움을 견뎌낼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걸고. 그런 경우 노동조합이 있다면 그 사람을 조직의 부당한 조치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조라는 보호막은 경찰관들을 법과 원칙, 상식과 양심에 따라 근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노조가 관찰자가 되므로 조직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부패에 대한 자정기능 효과도 기대된다. 경찰관과 경찰조직을 상대로 막말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노조차원에서 사과를 요구할 수 있고, 경찰과 치안에 관련된 정부의 각종 개혁 작업에 대해 일부 지휘부의 입장이 아닌 경찰관 전체의 공식 입장을 제시할 수 있어 정책의 현실성과 실행가능성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경찰의 기본 업무에 충실하도록 노조가 돕고 인도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간 활동한 경찰개혁위원회에서 마련한 권고안에 경찰관 노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다면 개혁 작업은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한국 외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는 경찰관 노조가 있다. 2005년 미국 L.A.의 한 경찰서 형사반장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L.A. 경찰관 노조는 매년 시의회와 임금협상을 한다. 뉴욕 경찰은 계급별로 노조가 있어 새로운 제도 도입 시 협상하고, 업무환경 개선, 임금 협상 등을 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는 경찰노조가 설립되어 있으며, 영국을 제외한 나라들에서 노동3권이 모두 보장된다. 종종 프랑스 경찰이 파업 중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 전역의 경찰노조를 아우르는 유럽경찰노조연합과 유럽경찰노조연맹도 있다.


 경찰관 노조가 필요하다고 하면 ‘경찰이 파업할 때 치안은 누가 유지하느냐’, ‘경찰이 파업하면서 총기를 사용하면 위험하다’라는 우려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아직 한국 공무원들은 법적으로 단체행동권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경찰관 노조가 생기더라도 파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


 요즘 경찰관들은 ‘경찰관에게만 인권이 없다’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주취자로부터 욕을 먹거나 폭행을 당하고, 시위현장에서 똥물을 뒤집어쓰고 매를 맞으면서도 경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인내심의 한계까지 참아낸다. 참혹한 범죄현장과 변사사건 처리에서 받는 심리적 충격은 켜켜이 누적된다. 그러다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찰관도 많다. 최근 4년간 한 해 평균 22명의 경찰관이 자살하였으며, 일반 공무원보다 자살률이 1.7배가량 높다고 한다. 자신의 인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 것이다. 이제 경찰관 노조 설립도 고려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