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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대출’ 받고 다시 일어선 장발장들(2019.01.14, 한겨레21)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1-11 11:25
조회
48
어려운 형편으로 벌금 낼 수 없는 빈곤ㆍ취약계층 돕는 ‘장발장은행’
100번째 전액 상환자 나와

“장발장은행이 없었다면 나는 노역을 살았어야 했다. 내가 노역을 사는 동안 3살짜리 딸과 아내가 어떻게 생활했을지 아찔하다.”

우민준(31·가명)씨는 2015년 겨울 새벽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신호가 바뀌었는데 자동차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자동차보험 기간이 만료돼 무보험 상태였다. 우씨는 “다른 사람한테 차를 장기간 빌려줬다가 받은 지 얼마 안돼 보험료를 내지 않은 것을 사고 난 뒤에야 무보험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벌금 200만원이 나왔다. 신용대출로 받은 빚 2천만원을 매달 150만원씩 갚고 있어서 벌금을 낼 여력이 없었다. 40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우씨의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린 딸과 아내를 두고 노역을 살 수도 없었다. 우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장발장은행에 전화했다. 이전에 받은 벌금 70만원을 함께 내기 위해 장발장은행에서 230만원을 빌렸다. 우씨는 10개월 만에 230만원을 나눠 모두 갚았다. 우씨는 83번째 전액 상환자가 됐다.

7159명이 11억8800만원 후원

2018년 12월26일 장발장은행에 100번째 전액 상환자가 나왔다. 장발장은행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못 내 노역장에 가는 사람을 줄여보고자 2015년 2월 출범했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선고받은 다음 생계 곤란 등의 이유로 벌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다. 무이자·무담보로 300만원이 한도다. 6개월 거치(그대로 둠) 기간을 거쳐 1년간 똑같이 나눠 갚는다.

개인과 단체의 기부로 운영되는 장발장은행은 2018년 12월9일까지 7159명이 총 11억8800여만원을 후원했다. 5천원, 1만원, 2만원, 10만원 등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이렇게 마음을 모은 장발장은행을 통해 노역을 피한 사람은 모두 613명이다.

89번째 상환자인 류찬규(31·가명)씨도 장발장은행의 도움을 받았다. 류씨는 2017년 잔뜩 취한 채로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출동한 경찰과 다퉈 벌금형 500만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2010년 한국의 한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한국에 왔던 재중동포 류씨는 당시 사회 초년생이라 벌금을 낼 수 없었다. 변호사 비용 등으로 목돈 500만원가량을 이미 쓴 상태였다. 주변에서 200여만원을 빌렸지만 나머지 250만원은 구하기 어려웠다.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시중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기도 쉽지 않았다. 장발장은행은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류씨는 “당장 벌금을 낼 돈이 없었지만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벌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벌금을 못 내 노역을 치르면 회사를 다닐 수도 없는데다, 아마 한국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장발장은행 덕에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이직에 성공해 내 꿈과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류씨는 당시 상황을 함께 넘긴 여자친구와 올해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

우씨나 류씨와 달리 김아무개(당시 55살)씨는 벌금을 못 내 노역장에 유치됐다. 김씨는 지난해 4월 서울구치소에 입감된 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 김씨는 2017년 12월 서울 한 마트의 의자에 있던 가방을 훔친 혐의로 벌금 150만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김씨의 한 달 수입은 수급비 70만원이 전부. 쪽방에 살며 생활을 겨우 이어가던 김씨에게 150만원은 큰돈이었다. 벌금을 내지 못한 김씨는 ‘폐부종을 동반한 심부전’으로 수술받은 뒤 퇴원해 서울구치소에 입감됐다. 그리고 이틀 뒤 ‘심부전 악화’로 숨졌다. 어떤 이에겐 큰 의미 없는 돈 150만원이, 김씨에겐 수술한 뒤 노역장에 가야 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김씨는 벌금 분할 납부 대상인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이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 과료를 납입하지 아니한 자는 1일 이상 30일 미만의 기간 노역장에 유치하여 작업에 복무하게 한다.”(형법 제69조 2항)

김씨가 온전치 못한 몸으로 노역장을 간 건 ‘환형유치제’ 때문이다. 현행법상 벌금을 내지 못하면 ‘벌금’에서 ‘노역’으로 형벌의 종류를 바꿀 수 있다. 환형유치로 노역장 처분을 받으면 일반 수형자처럼 교정시설 노역장에서 일한다. 목공·봉제·식품가공 등의 작업을 한다.

김씨처럼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한 해 약 4만 명. 벌금형이 부과됐던 사건 중에 벌금을 내지 않아 노역장 유치로 전환된 사건은 2010년 4만800여 건에서 2014년 3만5600건으로 줄었다가 다시 2016년 4만2600여 건으로 늘었다. 벌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늘어난 셈이다.

노역장 전환 사건의 대다수는 300만원 이하의 소액 벌금형이다. 2015년 12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낸 자료집 ‘소액 벌금 미납자에 대한 노역장 유치 제도의 운용 현황과 문제점’을 보면, 노역장 유치 사건의 선고 벌금액은 20만원 이하가 10.8%, 21만~50만원이 17.6%, 51만~100만원이 23.4%, 201만~300만원이 13%, 301만원 이상이 16.2%를 차지했다. 300만원 이하인 경우가 총 84%로 노역장 유치 사건의 대부분이 소액 별금형인 셈이다. 노역장 유치자의 죄명은 과실범, 사기·횡령, 폭력, 절도 등이 60%를 넘었지만, 수형자의 경우는 사기·횡령, 절도, 강도, 살인 등의 비율이 높았다. 범죄의 경중을 따졌을 때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징역형 대신 내리는 벌금형이,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다시 자유형(일정한 곳에 가두어 신체적 자유를 빼앗는 형벌)으로 환원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노역장은 벌금을 내도록 강제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벌금을 대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서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환형유치제’가 불공평한 이유는 한국이 벌금제를 매기는 방식이 총액벌금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 범죄에 대한 벌금을 총액으로 정하고 있다. 벌금액은 모든 범죄에 5만원 이상, 범죄에 따라 상한은 별도로 규정하고 확정판결일에서 30일 이내에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절도죄는 형법 제329조에 따라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범인의 환경을 고려해 벌금액을 선고하지만, 상한액이 정해진 만큼 재벌이라는 이유로 많은 벌금액을 매길 순 없다. 따라서 수십억대 자산가나, 수급비로 생활하는 김씨나 같은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자산가에겐 쉽게 낼 수 있는 벌금액이, 김씨에게는 몸으로 때워야 할 수준이 된다. 경제적 불평등이 형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평등을 가장한 불평등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총액벌금제는 범죄자의 경제적 능력과 납부 능력을 고려하지 않아 불법에 따른 형벌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노역장 유치는 최장 3년을 넘길 수 없어 벌금액이 클수록 일당도 높아진다.

총액벌금제 논란은 2014년 도드라졌다. ‘일당 5억원’ 황제 노역으로 논란을 빚은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장본인이다. 허 전 회장은 법인세 508억원을 탈세하도록 지시하고 100억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당시 법원은 50일 동안 5억원으로 노역 일당을 책정했다. 대다수 서민이 일당 5만원짜리 노역을 하는 것에 비하면 약 1만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황제 노역이 논란을 빚자 국회는 벌금 1억원 이상 5억원 미만이면 환형 유치 기간 300일 이상,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500일 이상, 50억원 이상이면 1천 일 이상으로 하는 개정안을 2014년 5월 통과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사실상의 징역형’

2012년 10월 독일의 유명 축구선수 미하엘 발라크는 제한속도 120㎞인 스페인의 한 도로에서 시속 211㎞로 자동차를 몰다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벌금 1만유로(약 1280만원)와 면허정지 2년의 처벌을 받았다. 2002년 노키아의 안시 반요키 부회장은 오토바이 과속으로 11만6천유로(약 1억4800만원)를 벌금으로 냈다. 하지만 발라크나 반요키 부회장이 한국에서 속도위반을 했다면 범칙금 8만~12만원만 내면 된다.

부자에겐 형벌로 가닿지 않고, 가난한 자는 몸으로 때워야 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는 현행 법체계 때문에 시민단체 등에선 총액벌금제 대신 일수벌금제를 주장해왔다. 일수벌금제는 범죄자의 재산이나 소득과 연계해 벌금액을 정한다. 판사가 벌금을 ‘금액’이 아닌 불법과 책임의 정도에 따라 ‘날수’로 정하고, 이 날수에 범죄자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하루치 일당에 해당하는 벌금액을 곱하는 식이다. 재산·소득 정도에 따라 벌금액에 차등이 생겨 벌을 받는 개인에게 주는 경제적 타격이 상대적으로 공평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사실상의 징역형’을 줄일 수도 있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등이 시행하고 있다.

일수벌금제 도입을 주장해온 오경식 강릉원주대 법학과 교수는 “형벌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제재를 가하거나 (범죄 예방 효과인) 위하적(위협적)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총액벌금제에는 위하적 효과가 없다. 되레 부자에겐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가난한 사람은 자유를 속박당한다”며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면 부자에게도 형벌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고, 자신의 경제적 상황만큼 벌금액을 책정받은 가난한 사람은 ‘사실상의 징역형’을 피할 수 있다. 또 국가에서 걷는 벌금액이 커져 벌금으로 일부 지원하는 범죄피해자 기금 등도 늘어나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5월 대선공약으로 ‘서민을 위한 공정 사법 구현’ 민생사법 정책을 발표했다. 당시 문 후보자는 “벌금 등 분납제를 강화하고 장발장은행을 확대하는 한편, 소득 비례 차등 벌금제(일수벌금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19대 국회에서 김기준 전 민주당 의원과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이 2014년, 2013년 각각 일수벌금제 도입을 내용으로 한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선 법원이나 검사가 벌금을 대체하는 사회봉사 제도를 고지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현재 계류 상태다.

“형벌의 형평성이라는 정의 구현해야”

장발장은행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늘고 있지만, 사실 장발장은행의 꿈은 ‘장발장은행이 없어지는 것’이다. 장발장은행은 총액벌금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수벌금제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 법체계 아래 민간에서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동안 기초생활수급권자, 장애인 등에게만 한정됐던 벌금 분할 납부와 납부 연기가 2018년 1월부터 일반인도 신용카드로 낼 수 있고 할부 결제도 되는 등, 일부 벌금제 개혁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벌금형의 집행유예, 카드 납부 등에서 일부 개혁이 됐지만 가장 중요한 건 벌금을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달리 내는 것”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형벌의 형평성이라는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발장은행이 문 닫는 날은 일수벌금제가 도입되는 그때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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