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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익의 인권수첩]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경향신문, 2018.07.1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8-14 11:16
조회
457

둘째 딸의 갑질이 시작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유리컵을 던지고 막말을 했단다. 범죄 혐의는 특수폭행이다.


다음은 엄마였다. 딸보다는 혐의가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자, 운전기사 등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단다.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세 번째로 아빠가 수사 대상이 되었다. ‘가장’의 존재감인지 이번엔 좀 더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이었다. 첫딸은 땅콩회항을 일으켰고, 아들은 아빠가 주인 노릇하는 대학에 부정 편입학까지 했단다. ‘범죄 가족’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는 살펴봐야겠지만, 가족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폭행 등으로 한 번, 가사도우미 문제로 한 번, 합해서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모두 네 번의 영장 청구가 있었고, 결론은 모두 기각이었다.


얼핏 보면 조씨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된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 고약했다. 사회적 책무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일삼았으니 엄정(嚴正)하고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무릇 모든 범죄에는 죗값이 따라야 한다. 재벌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게 바로 정의다.


그러나 범죄자에게 묻는 죗값은 딱 죄를 진 만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경찰과 검찰은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 여론 재판을 해버렸다. 단지 범죄 혐의를 의심하는 단계였는데도 범죄 사실은 물론, 범죄와 별 관련 없는 일까지 언론에 알렸다. 조씨 일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게 마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애먼 사람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니었지만, 벌주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다 망신 주고 과잉형벌을 남발했던 옛날의 인민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구속영장 청구다. 세 사람에게 네 번의 영장 청구. 어쩌면 네 번으로 영장 청구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씨 일가에게 반복적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 속의 특전사와 닮았다. 법률전문가로서의 양식이나 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속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70조)가 있고,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에 할 수 있다. 구속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고려해야 한다.


구속은 형사사법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애면 죄를 물을 수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없기에 마련한 부득이한 절차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사사건에서의 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에 달려 있다. 구속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속은 남발하면 안되는, 사실은 이례적으로 적용해야 할 절차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제198조)고 천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준수사항’으로 따로 정해두고 있다. 불구속이 원칙이니 그 원칙을 따르고 좇으며 지키라는 것이 법의 명령이다.


그가 누구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하고, 감옥에 보내는 일은 재판을 해 본 다음에,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속하라는 거다.


조씨 일가의 범죄들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불구속 수사 원칙을 깨뜨릴 만한 것이었는지,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예외 없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재벌 일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은 악질 재벌을 단죄하는 정의의 수호신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벌 일가를 구속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시민적 요구와 짝하기에 부담도 없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하는 법원은 치도곤을 당한다. 영장 전담 판사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한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꽃놀이패다. 영장청구권은 검찰에만 있지만,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써도 검찰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다. 모처럼 다수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국민 모두가 갖는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재벌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홈스가 옹호하려 했던 사상의 자유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를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갑질이나 일삼는 재벌 피붙이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씨 일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만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은 검찰의 마구잡이 영장 청구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재벌가 사람들조차 저런 대접을 받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비싼 변호사를 살 수도 없는 시민들은 크든 작든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장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원칙은 언제나 어떤 경우나 꼭 지켜야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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