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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가 말하는 한국이 ‘폭력의 지뢰밭’이 된 이유 (한국일보,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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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4-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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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1>홍세화 


 “디지털 성착취, 인문학적 항체 빈곤이 낳은 현상 


 국가가 구성원 ‘몸의 자유’ 분탕질 한 과거가 원죄” 


 정당인, 언론인 거쳐 '장발장은행'의 은행장 맡아 


모든 건 41년 전 오를리공항에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프랑스 파리는 대한민국 서울과는 무게가 달랐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듯, 사람들은 펄떡였다. 박정희 유신체제 한복판에서 대학을 다닌 그에게는 특히 그랬으리라. 한국 사회의 무거운 공기가 파리에서 새삼 느껴진 거다. 파리는 서울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도시였다.


다니던 무역회사의 파리 지사로 발령 받아 건너간 1979년 5월의 일이었다. 다섯 달 뒤 한국에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 터져 난민 처지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정권은 남민전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조직원 84명을 잡아들였고 관련자들에겐 사형, 무기, 징역 1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재문씨는 옥중에서 병으로, 신향식씨는 형장에서 세상을 떴다.


이들처럼 ‘남민전의 전사’였던 홍세화(73)씨는 그때 파리에 있어, 살아남았다. 유신 말기까지 서슬 퍼런 정권의 칼끝이 프랑스까지 향했으니 망명 신청은 선택이 아닌 당위였다. 그는 지금도 “한국에 있어 고문을 당하고 장기간 옥살이까지 했더라면 인성이 완전히 파괴됐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과 프랑스 사회의 많은 차이 중에서도 그가 톨레랑스를 건져낸 데엔 이런 배경이 주효했을 거다. 다를 수 있는 자유,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동경이기도, 갈망이기도 했다. 그에게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톨레랑스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은 그의 첫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이하 ‘택시운전사’ㆍ창작과비평사)가 1995년 국내에서 출간되자마자 25만 부가 넘게 팔렸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리하여 그의 인생을 가른다. 한국 사회에서 그는 ‘KS’(경기고-서울대 라인) 출신이자 남성이라는 기득권이었으나 파리에선 이런 계급이 별 도움되지 않는 소수자이자 약자였다. 거기서 오는 불안과 물질적 결핍에서 그를 자유롭게 한 게 ‘택시운전사’였다. 이 책의 성공으로 그는 비로소 “나를 자유롭지 않게 만드는 것들에서 벗어났다”고 돌이켰다. 이후 그가 걸어온 언론인, 정당인, 시민단체인으로서 활동이 사회 약자와 소수자의 자유에 맞춰진 것은 그가 경험한 파리 시절 덕분이다.


올해 낸 새 책 ‘결: 거칢에 대하여’(한겨레출판)에서 특별히 자유의 의미를 되짚은 그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두고 “(일부 남성들의) 일그러진 권력욕을 넘어 자유의 기본인 몸의 존중이 무너진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항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도리어 사회구성원의 몸을 유린해온 역사가 괴물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을 덧붙이면서.


스스로를 ‘소박한 자유인’으로 칭하는 그를 2일 서울 마포구 와우산공원 근처에서 만났다. 그가 만든 같은 이름의 독서모임 공간이었다.


 ◇대학 땐 남산으로, 군 복무 땐 보안대로 


 -1966년에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가 69년 다시 외교학과에 입학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죠. 


“고등학교 때 영어보다 수학이 나은 편이라 별 생각 없이 이과를 선택해 공대에 진학했는데 별로 흥미가 없었어요.”


 -웬만하면 그래도 그냥 다니는 편인데 자퇴까지 했어요. 


“전쟁이나 분단 같은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계기가 있었거든요.”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다기 보다 그런 고민이 커서 그랬군요. 


“그때까지 반공교육으로 배웠던 사실과는 철저히 배치되는 역사를 알고 나서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한 청소년의 가치관, 세계관이 붕괴되는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방황이 시작됐고 공부 자체에도 별 의미를 두지 못했어요. 뭔가 다 놓고 싶었죠.”


 -그 정도 수준이었나요. 


“실존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졌으니까요.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고요. 큰 관심은 분단 문제였는데, 나중엔 국제정치 속에서 한반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학교(금속공학과)를 그만두고 나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요. 그래서 외교학과에 진학한 거죠.”


 -연극반 활동을 했다고요. 


“(연극연출가이자 국악인인) 임진택이 고등학교로 치면 3년 후배인데 제 외교학과 동기였어요. 그 친구도 전공에 별로 재미를 붙이지 못했죠. 한번은 학교에서 20명에게 진로 조사 같은 걸 한 적이 있는데, 20명 중 18명은 ‘외교관’이라고 적고 2명은 다른 걸 적은 거예요. 그 중 하나가 저랑 그 친구였죠. 저는 그저 졸업이 목적이라는 뜻에서 ‘정치학사’를, 임진택은 ‘월급쟁이’라고 적었죠. 하하. 그 친구가 연극반 반장을 했는데 나중에 저까지 끌어들인 거예요.”


그도 ‘증인’(신명순 원작)이라는 작품의 무대에 배우로 오른 적이 있다. 6ㆍ25 전쟁 당시 이승만의 한강철교 폭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 당한 대령의 원혼을 풀어주는 일종의 재심 재판정에 서는 변호인이었다.


 -그 시기 학생운동으로 고초도 겪었고요. 


“4학년 때 선언문(유신체제를 비판한 민주수호선언문 사건) 하나를 썼다가 발각이 됐어요. 당시 중앙정보부 6국(고문수사로 악명 높았던 남산 취조실)과 시경(서울경찰청) 대공분실에서 단련을 좀 받았죠. 한 학기 남겨두고 학교에선 제적 당하고요. 이듬해 군에 입대했는데 그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아서 보안대에 끌려가서 한달 정도 있었죠. 국가 폭력을 경험하면서 체제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생겼어요. 1인독재로 사회 모든 구성원이 완전히 억압돼있는 상황을 부정하고 싶은 의지가 제게는 곧 실존의 의미로 다가온 거예요. 그 시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죠.”


 -남민전의 전사가 된 이유군요. 


“나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전사’였고, 빠리의 택시운‘전사’였죠.”


 -책에서도 ‘전사’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어요. 


“조직 이름이 ‘전선’이니까 전사였어요. 남민전 결성 계기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이 처형 당하면서죠.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리는 게 우리의 과제였어요. 저는 제대한 뒤에 동기인 박석률에게 경찰식 표현대로 하면 ‘포섭’됐죠. 하하.”


 ◇정권의 ‘사법살인’이 남민전으로 이끌다 


 -남민전 활동을 시작할 때 고민은 없었나요. 


“남민전은 이원화된 조직이었죠. 처음엔 (전술조직인) 한국민주투쟁위원회 활동을 했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는 조직이니 반체제 성격은 아니었죠. 한국민주투쟁위의 ‘투사’로 활동할 때는 그래서 큰 거부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남민전은 이름부터 반체제 성격이 드러나잖아요. 위험 부담이 훨씬 큰 활동이니 고민이 됐죠. 그런데 그걸 쓸어버린 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여덟 분의 죽음이었어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괴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이라면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가공의 단체를 조작한 사건이다. 이듬해 4월 8일 대법원은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또 다른 17명에겐 징역 5~20년형 또는 무기징역을 각각 확정했다.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법 살인’ 사건이다.


 -인생에서 남민전은 어떤 의미인가요. 


“돌이켜보면 무모했던 면이 없지 않죠. 그렇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일상적으로 고문이 이뤄지는 정권에 어떻게든 맞서야 한다는 실존적 요구가 제 안에선 있었어요. 말하자면, 그런 한계 상황에서 어떤 것이 실존인가 하는 물음이 있었던 거죠. 당시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런 선택을 다시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파리 생활이 시작된 건 1979년 5월 현지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죠. 


“맞아요. 그런데 그 해 10월 한국에서 남민전 사건이 터졌고 연루자들이 잡혀 들어갔죠.”


그도 우여곡절을 거쳐 회사 생활을 정리했다.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1982년 프랑스 정부에 망명 신청을 했고 승인됐다. 그가 정식체류증과 함께 받은 여행문서(망명자들의 여권)에는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코레(Corée)’란 문구가 선명했다.


 ◇한국의 ‘KS계급’에서 프랑스의 난민으로 


 -택시운전을 하게 된 계기는요. 


“망명 허가는 어렵지 않게 받았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조언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막막했어요. 그래도 ‘먹물’(배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르몽드’ 신문은 읽었는데, 거기 조그맣게 택시학원 광고가 있더라고요. 찾아가선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느냐’ 물으니 ‘너 같은 사람이 하는 거다’라고 답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물었나요. 


“나는 난민 처지니까,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위축된 상태였죠. 학원에서 알아 보니 돈 내고 학원 다닐 필요 없이 시험만 붙으면 되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준비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죠. 하하.”


 -구직 기간이 길었나요. 


“그랬죠. 그 사이 관광 안내 일을 했는데 그건 연락이 와야 할 수 있는 불규칙한 일이었으니까요. 망명 자격을 받은 뒤로도 4년을 구직을 하며 보냈어요. 그 사이 제 처는 면세점 판매원으로 취직을 했고요. 그러니 굉장히 불안정하고 불안한 일상이었죠. 원인 모를 두통이 그때부터 심해졌어요.”


 -그러다 택시운전으로 안정적인 직업이 생긴 거군요. 


“택시운전 하면서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죠. 몸이 너무 고되긴 했지만, 난민도 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역시 제가 워낙 약골이어서 버거웠어요. 제도가 택시를 주간 단위로 빌려서 운행하는 구조였는데, 월요일마다 임대료를 내야 했거든요. 4일간 일해야 그 값이 나왔어요. 월화수목 일해 버는 건 임대료로 나갈 수밖에 없고 금토 운행해 버는 돈이 제 수입이 되는 거였죠. 그러니까 조금 더 벌려면 일요일까지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한 달에 고작 이틀을 쉬었으니 힘들었죠.”


 -재미도 있었나요. 


“해방감이 중요했어요. 적어도 운전대를 잡으면 굶진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택시운전은 얼마나 했나요. 


“3년 정도 했죠. 몸이 버티기 힘들어져 갔거든요. 또 당시에 노태우 정권으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달라져서 한국 수출입 회사들에서 유럽의 구입 연락선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해서 운전대를 놓게 됐죠.”


 -책 ‘택시운전사’를 쓰게 된 계기가 뭔가요. 


“한국에서 파리를 오가는 동료나 후배들이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 글을 써라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 그럼 한번 써보자’ 싶어서 93년에 집중적으로 썼죠.”


 -글을 쓰면서 어땠나요. 


“처음에 한국어 표현을 많이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어요. 한국 사회와 거리를 두고 산 지 15년 가까이 지난 데다, 파리에서도 한국 사람들을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며 지내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적확한 단어로 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어쩌지 싶었죠. 그런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했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거지 그런 표현이 있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한번은 글을 쓰다가 영 생각이 안 난 표현이 있어서 ‘그럼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자’ 하고 넘어간 적이 있는데 나흘째 되는 날 번개처럼 떠오른 거예요! 그 표현이 뭔 줄 아십니까. ‘넉살 좋다’! 하하하. 그 뒤로는 충분히 쓸 수 있겠다 자신했죠.”


 ◇작심하고 쓴 ‘톨레랑스 론’, 성공하다 


‘택시운전사’는 구어체로 쓴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책의 끄트머리엔 ‘그래도 못다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여 22쪽 분량으로 프랑스 사회의 톨레랑스를 따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역시 입말로 썼다. 그가 프랑스에 살면서 경험으로 체득한 톨레랑스 소개론이었다.


 -프롤로그와 ‘그래도 못다한 이야기’를 구어체로 쓴 것도 당시로선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아이디어인가요? 


“그렇죠. 위치만 중간에 있던 걸 편집자와 소통하면서 맨 앞으로 끌어온 거죠. (후기에 앞서) 쓴 톨레랑스 부분은 편집자가 양이 너무 길다고 줄이자고 했는데 제가 절대 안 된다고 했죠. 책의 메시지가 거기 다 담겨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국 사회엔 톨레랑스 붐이 일었다. ‘홍세화’란 이름 역시 대중에게 또렷이 알려졌다. 한국 사회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글을 쓰는 지식인으로. 그의 표현대로 ‘상징자본’을 갖게 된 계기다.


 -구어체는 관광 가이드 경험에서 온 아이디어이기도 할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하죠. ‘빠리에 오세요’라며 파리를 소개하는 형식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져서 개정판을 거듭 내면서 내용도 좀 바뀌었죠. 프롤로그는 금방, 확 썼어요.”


 -육필로 쓴 건가요? 


“워드프로세서요. 92년께 고교 후배이기도 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영국에 1년간 (유학으로) 머문 적이 있어요. 한 다리 건너 (소개로) 그를 알게 됐죠. 그러다 그가 귀국하면서 자기가 쓰던 워드프로세서를 저한테 보내줬어요. ‘선배님, 글 쓰셔야지요’ 하면서 주고 갔죠.”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네, (미소) 그래서 그걸로 당시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썼어요.”


 ◇‘택시운전사’로 얻은 자유… 응어리를 풀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을 듯해요. 


“일단 책이 나오면서 두통이 없어졌어요. 파리에 있는 동안 내내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거든요. 체기에서 오는 두통 같은 거였죠. 그런데 책이 나온 이후 그게 가셨어요. 응어리를 다 토해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안에 있는 걸 끄집어 내고 나니까 두통이 가신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 난민 출신으로 프랑스 사회에 살면서 느낀 감회, 택시운전사로 파리 거리를 누비면서 한 경험을 술회한 것이니까 이 책으로 두 사회가 만났다는 의미도 있죠.”


 -책이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당연히 좋았죠. 처음 제 처와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1쇄만 찍고 그치면 섭섭하니 2쇄까지만 나오면 좋겠다고. 그런데 출판사에서 제 사진까지 넣어서 신문에 5단 통광고(하단 전체)를 낸 걸 보고 굉장히 놀랐어요. 제 아버지가 그걸 오려서 우편으로 보내줄 정도였으니까요. 책이 3월에 나왔는데, 6월에는 주간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하고요.”


‘택시운전사’는 출간된 해에만 25만 부, 지금까지 모두 6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됐겠죠. 


“맞아요. 인세도 만만치 않게 나왔어요. 그간 제대로 돈 벌어본 적이 없는 제게는 어느 수준의 돈을 최초로 벌게 해준 책이죠.”


 -한국과 프랑스 사회는 실제 다른 부분이 많을 텐데 그 중에서도 톨레랑스를 집어낸 이유는 뭔가요. 


“저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하게 보였으니까요. 프랑스도 톨레랑스를 많이 강조하는데 그건 프랑스 사회도 부족하니까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죠. 지금까지도 여전히 톨레랑스에 큰 진전이 있다고 보기 어렵잖아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죠. 과거엔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학살하고 고문했고 지금도 성 소수자나 여성 차별 문제를 보면 차이가 억압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단순한 수필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을 담은 글로 썼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요. 


“메시지를 담은 거죠. 읽는 분들이 기존에 가진 생각의 틀에 작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글 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희망사항 아닐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봤으니 동의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죠. 


“그러기를 바랐죠. ‘택시운전사’로 물질적 결핍이나 제도적 억압에 의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내겐 가장 중요한 의미예요.”


 -결과적으로 이 책 덕분에 귀국도 하게 됐고요. 


“그렇죠. 4년 뒤인 99년에 두 번째 책(‘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을 내면서 한국 방문 행사를 했거든요. 정치적으로는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넘어간 시기고요. 사실 김영삼 정부 때 한국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제 귀국해도 되지 않느냐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투옥 중이던) 남민전 동료 선배들이 노태우 정부의 유화책으로 88년 12월 23일에 다 출소한 상태였고요. 그래서 93년 한국 법무부에 (귀국 가능 여부를) 문의한 적이 있었는데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았죠.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다시 법무부에 알아보니 내 사건은 이미 87년에 공소 시효가 끝났더군요. 그런데 이전 정부들에선 확인을 안 해준 거예요. 98년에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아내와 자녀들까지) 네 식구의 여권을 모두 신청했죠. 석 달 있다가 여권이 나왔고 받아 든 순간 망명자 신분도 끝났죠.”


1999년 그는 20년 3개월 만에 고국을 방문했고, 3년 뒤인 2002년 영구 귀국했다.


 
 ◇제가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하나요 


 -2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소감이 어땠나요. 


“김포공항에 내려서 서울 소공동 쪽을 지나는 길에 대형 전광판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엄청 크게 박혀 있었죠. 처음에는 앞에 다른 구절이 빠진 줄 알았어요. 예컨대 ‘마음의 부자 되세요’랄지.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파리에 처음 내디뎠을 때 중력이 없는 듯한 느낌을 받아 충격이었다면, 서울에서는 그것 때문에 충격이었어요. 20년의 간극을 그때 느낀 거예요. 공중파TV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같은 광고 카피가 나오는 걸 보고도 경악했죠. 완전히 소유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뜻이니까. 아무리 돈이 좋대도 물신주의의 늪이 이 정도가 됐구나 싶었던 거죠.”


 -그렇게 변한 한국 사회에 적응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은 들지 않았나요. 


“음, 귀국해서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진행자가 ‘이제 좀 적응을 했느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적응해야 되나요’라고 되물었죠.”


나도 뒤통수를 맞았다. 은연 중 적응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렇군요. 


“제 심정이 그랬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적응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인가, 적응한다는 건 또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죠.”


생각해보면, 그의 책과 칼럼엔 그런 이방인의 시선이 담겼기에 읽는 이에게 생각할 여지를 던지곤 했다. 그는 ‘생각의 좌표’ 이후 올해 2월 11년 만에 낸 단독 저서 ‘결: 거칢에 관하여’에선 자유의 본질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말했다.


 -책에서 ‘나를 지을 자유’를 거론한 대목이 마음에 남았어요. 한국 사회의 많은 조직은 아직도 굴종을 당연하게 요구하니까요. 


“이 책에서 자유인에 대한 저의 고민을 풀고 싶었죠. 억압과 불안, 욕망에 의해 인간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훼손되는지요. 자유는 몸의 자유에서 출발하는데, 우리는 자유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학살과 고문으로 자유를 분탕질했죠. 자유보다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린 게 더 무서운 일이에요. 자본주의 사회라는 구조 안의 위계질서에도 많은 억압적 조건이 있고요.”


 -빼앗긴 자유, 버림받은 자유가 너무 많죠. 최근에는 몸의 자유를 너무나 처참하게 구속당한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이 있었고요. 특정 성의 특정 성에 대한 폭력이죠. 


“권력욕, 지배욕이 심각하게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 잔혹한 사건이죠. 이 문제를 두고도 저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인문학적 항체가 부족한가를 생각하게 돼요. 교육이 죽어버린 사회죠.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뭘 공부하는 지는 관심 없고 몇 등인 지만 관심 있는 사회가 돼버렸죠. 교육의 의미가 실종된 사회에서 나타난 괴물적 현상이라고 보여요.”


그는 책에서 한국 사회를 “폭력의 지뢰밭”으로 표현했다. “최근 들어 갑자기 성폭력과 갑질이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와 같은 상습적 폭력이 구조적이라면,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 행위는 한국 땅 전체가 돌발적 폭력의 지뢰밭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은 특정 성별의 불특정 다수가 특정 성별의 불특정 다수에게 저지른 무차별적인 폭력이죠. 


“그래서 무섭죠. ‘당신은 몸을 소유한다’는 자유의 기본 명제를 담보해야 할 게 국가였는데 한국 현대사는 되레 그 국가가 폭력으로 사회구성원들의 몸을 유린했으니까요. 이 명제는 교육으로도 굳건하게 자리 잡혔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요. 그 결과 절제되지 않은 막무가내의 욕망과 결합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죠.”


 -책에서 종종 한국 사회의 ‘지적 인종주의’나 ‘GDP 인종주의’를 거론했는데 거기다 성별 인종주의도 만연한 거죠. 


“저도 취약한 부분이에요. 저는 밤에 골목길을 가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지만, 모든 여성은 다 두려울 거예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남성들이) 그 차이를 인지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등한시했죠.”


 -설득과 선동을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어요. ‘설득이 남의 기존 생각을 수정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선동은 남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강화, 증폭시키는 일’이라는 구절을 보면서 오늘날 정치판이 설득은 없고 선동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랑스의 정치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말한 것처럼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부는 없어요. 정치권 다수가 설득보다 선동을 하는 이유는 그게 먹히기 때문이에요. 기존에 가진 생각을 바꾸기보다 증폭시키는 게 훨씬 쉽거든요. 사람은 대개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고집하는 존재들이니까. 아무에게도 설득되지 않는다는 건 곧 나는 이미 완성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당신은 완성된 존재가 되셨네요’라고 하면, 모두 아니라고 답하겠죠. 모두 자기에게 입력된 것이 정답이라고 훈련된 채로 살면서요. 내가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을 인지하는 일은, 삶의 관계에서도 여백이고 겸손해질 여지인데 그게 너무 부족하죠. 그러니 말 품새는 굉장히 거칠고 생각의 올들은 성글고 굵죠.”


책 제목에 ‘결’과 ‘거칢’이란 단어를 쓴 게 그래서였다.


 ◇벌금 못내 교도소 가는 빈자가 1년에 4만 명 


 -지금 은행장으로도 활동하시죠? 


“맞아요. ‘장발장은행’이에요. 2015년 2월 문을 열었죠. 법을 위반해서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 벌금 낼 형편이 못돼서 교도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은행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연 평균 4만여 명이에요.”


 -벌금형은 집행유예가 없었다면서요.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그랬어요. 더 무거운 형벌인 징역형에는 있는데 말이에요. 얼마나 모순인가요. 장발장은행은 사실 잘못된 벌금 제도를 바꾸라는 시위를 하려고 만들어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아요. 그 노력으로 실제 2015년 12월 정기국회 마지막 날에 벌금제 개혁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됐죠. 500만원 이하 벌금형에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도록요. 한도를 둔 건 아쉽지만. 분할 납부나 납부 연기의 법률적 근거도 생겼죠.”


 -법 개정으로 실태가 많이 나아졌나요? 


“많이 줄어들기를 기대했는데 2018년 통계를 보니 개정 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1만 명 정도밖에 줄지 않았더군요. 1년에 3만5,000명 정도는 여전히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고 있어요.”


 -판사들이 적용을 잘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는 일이에요. 우리나라는 지금 총액벌금제를 시행하고 있거든요. 일수벌금제는 재산과 소득에 따라서 벌금에 차등을 두는 제도죠.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적용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핀란드 기업 노키아 부회장이 제한속도 시속 60㎞ 도로를 80㎞ 이상으로 타고 가다 단속에 걸린 일이 있었는데 벌금이 얼마나 부과됐는지 아세요?”


 -얼마였나요? 


“우리 돈으로 약 1억 4,000만원이었죠. 지금 우리 벌금 제도는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껌값’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신 교도소에 가서 노역으로 때워야 하는 돈인 거예요.”


 -이것도 무전유죄네요. 


“맞아요. 무전유죄에서 유자가 죄가 있다(有)는 뜻인데, 한국에선 죄를 이끈다(誘)는 뜻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하철 택배로 비아그라를 배송했다가 약사법 위반으로 적발된 노인, 이유식 배달이라도 해서 아이 먹여 살리려고 면허 없이 고물 차를 운행했다가 걸린 아이 아빠 같은 이들이 있거든요.”


돈이 없어 죄를 저지르게 되고 다시 또 돈이 없어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 노역을 해야 하니 맞는 말이다.


장발장은행은 취지에 동참하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올해 1월을 기준으로 7,875명의 개인과 단체, 교회가 10억8,257만원을 후원했다. “그 결과 783명이 감옥에 가는 대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경찰에게 붙들려 온 장발장에게 ‘이것도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미리엘 주교가 내어준 은촛대를 자처한 이들이다.


 ◇은촛대가 장발장에게 준 것은 


 -사회의 은촛대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일까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는 장발장을 회개하게 만들었고, 죽는 순간까지 지켜봤으며, 그를 지켜주기도 한 상징적 존재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돈이 없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국가는 엄중하고 사회는 냉대와 무관심을 보낼 때 이런 따뜻한 손길과 시선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은촛대에 비견할 건 아니지만, 이 사회의 장발장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이 은행은 빨리 문을 닫아야 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푯대가 있나요. 


“역시 자유가 제게 가장 중요한 가치예요. 나 스스로도 자유롭고자 했고 그걸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규명하고 분석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더불어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죠.”


그는 전사였고, 택시운전사였으며,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였다. 한겨레의 기획위원으로 토론면을 만들고 운용했으니 언론인이기도 했다. 진보정당 대표도 맡았으며, 지금은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이다.


그 모든 자리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그가 말했다. “나의 적극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조차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좀 더 자유를 누리는 쪽으로 흘러야 한다”고. 새 책에서 “귀국이 가능해졌을 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없었더라면 센 강변에서 배회하다가 소멸했을 존재의 자리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고 글을 쓰겠노라고 다짐했었다”고 한 고백과 궤를 같이하는 말이다. 그 존재의 자리란 소수자이자 약자의 처지 그리고 자유인의 시선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자유인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아니, 그런 의문조차 갖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은 어떠한가.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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