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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실천 큰 진보[조효제교수, 한겨레 04.2.7)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7:12
조회
421
작은 실천과 큰 진보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어느 시민사회 활동가를 만났을 때다. 그는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운동가로 시작해서 현재는 정치개혁을 다루는 국제엔지오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세계 시민사회 운동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운동형 활동과 봉사형 활동이 만나지 않으면 시민사회에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민족회의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민족회의는 조직의 모든 운동가에게 일주일 중 하루는 반드시 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도록 요구했다. 그 역시 매주 고아원에 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봤다고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운동가로서 현실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고, 인간을 섬기는 정신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기 단체의 활동가에게도 반드시 봉사활동을 하도록 한다면서 “양로원의 냄새를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화를 맺었다.

인종차별 정책에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투쟁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여기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두 가지 실천방식의 바람직한 조우를 본다. 그의 말을 일반론으로 이해하자면 높은 이상과 낮은 실천의 양립이 될 것이다. 그런데 논의의 초점을 조금 바꿔 다음과 같은 우문을 던져보자. 세상을 바꾸는 두 가지 방식 또는 거시구조와 생활세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변화시키기 어려울까 우스운 말로 표현해 혁명과 금연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정답은 물론 두 가지 모두 어렵다로 나올 것이다. 다른 차원의 실천에는 다른 차원의 난이도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수준의 문제들은 근원성의 정도에서 차이가 날지언정 실천의 어려움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생활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 그 행위자의 개인적 책임이 더 뚜렷하게 부각되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나아가 생활세계를 바꾸지 않고서 거시구조를 바꾸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생활세계의 변화가 없는 거시적 변화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상황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최근 나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1888년 강화에서 태어나 한성사범학교를 나온 선생은 교편생활을 하다 한-일 합병 후 제생원 맹아부에서 맹아교육을 맡게 되었다. 송암 선생은 제생원 졸업생들을 비밀리에 규합해서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만들고 한글 점자화 작업을 시작하여 드디어 1926년 11월4일 한글을 6점 점자로 표기할 수 있는 ‘훈맹정음’을 반포했다. 그 후 선생은 점자투표 운동, 제헌국회 교육법의 점자 공식화, 점자책 발간 등 평생을 시각장애인의 대의를 위해 바치고 1963년에 “점자책 … 쌓지 말고 꽂아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임종했다. 이분의 생애는 말 그대로 생활세계의 진보를 위해 바쳤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공적이 어떤 거시적 진보에 못지않다. 며칠 전 서울대 법대에서 완전실명 학생을 합격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학문 공동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생활세계의 작은 상식 하나가 실현된 사건에 불과하고 거시적 변화와는 거리가 있는 일인데도 이것이 우리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치와 외치가 온통 뒤숭숭한 현실 속에서 거대 담론에 열중한 사회분위기에 주는 어떤 무언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 정치개혁만큼이나 힘들었을 학교내 변화를 이끌어낸 그 성실한 실천이 ‘구조주의자’인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큰 이야기는 혼자서 다 하면서 생활세계에서는 관성과 인습과 눈치보기에 매몰되어 비겁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누가 아는가, 이번에 입학한 학생이 대법원장으로 자라나 장애를 차별하는 세상을 완전히 바꿀 날이 오게 될지.

조효제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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