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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익의 인권수첩]개헌, 그리고 국민(경향신문, 2018.03.23)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23 18:18
조회
133


1987년은 격동의 시절이었다. 박종철에서 직선제 대통령 선거까지,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시대의 요구는 명확했다. 이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보자, 앞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고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5년 단임제 개헌은 1노 3김의 셈법이 맞아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한 번씩은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고들 했다. 결국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87년 헌법을 그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세상이 너무 뜨거웠다. 제6공화국 헌법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담고 세상에 나왔다. 기본권 조항은 훨씬 더 탄탄해졌고, 헌법재판소 설립으로 헌법 수호 기능은 강화되었다. 잘 만든 헌법이었지만, 헌법 개정 과정에서 주권자의 몫은 없었다. 주권자의 역할은 단지 국민투표에서 그쳤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민주주의였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헌법을 그저 권력구조에 대한 기준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처럼 헌정질서를 망가뜨린 독재자들의 추악한 권력욕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일 게다. 하지만 헌법은 그 나라 국민들의 삶의 원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다. 해서 헌법은 함부로 고칠 수 없고,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개정할 수 있다. 어떤 헌법을 선택할지는 주권자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를 통해 사흘 연속 발표한 헌법 개정안은 지난 31년의 역사적 성과와 국민적 염원을 잘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시대상황도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인권을 보장받을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규정한다든지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고, 공무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하도록 했다는 대목은 반가웠다. 우리나라도 이젠 다른 나라 부럽지 않은 인권선진국이 될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대통령 개정안은 생명권과 안전할 권리를 분명히 밝히고, 토지공개념 원칙을 제시하는 등, 현행 헌법의 부족한 면을 잘 보충하고 있다. 확실한 진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아쉽다.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명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란 측면에서도 그렇다. 개헌안은 ‘국민을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란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지금 벌어지는 헌법 개정을 둘러싼 온갖 논란 속에 국민의 자리는 별로 없다.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국회 논의야 그렇다 쳐도, 대통령은 좀 달랐어야 한다.

대통령이 구성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3일 출범했다. 이 위원회가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자문안을 보고한 것은 지난 13일. 꼭 한 달 만의 일이다. 위원회는 지난 한 달 동안 분과위 차원에서 2박3일 합숙토론도 했고, 1박2일로 끝장토론도 했단다. 분과회의는 합해서 17번을 했고, 전체회의는 4번, 여러 차례의 간담회도 했단다.

그러나 ‘내 삶을 바꾸는 헌법’을 위해서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숙의 토론회를 했고, 청소년, 청년들과도 숙의 토론을 했다지만, 모두 일회적 행사였다. 어쩌면 위원들이 지닌 전문성 덕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치고는 너무 졸속이었다.

70년 전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과정은 그래서 참고할 만하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가 만든 초안을 두고 2년 동안 치열하게 논의했다. 모두 85번의 공식회의를 거쳐 수정을 거듭했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만든 최종안은 유엔총회의 사회·인도 및 문화적 사안에 관한 제3위원회로 넘겨져 넉 달 동안에만 모두 100차례가 넘는 회의를 거쳐 검토했다. 이 기간에만 모두 1233회의 투표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산고에 비견할 만한 과정이었다. 그랬기에 세계인권선언은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인권의 야전교범이 될 수 있었다. 세계인권선언의 역할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야당의 발목잡기 때문에 일종의 비상사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헌법 개정의 방향이나 내용도 모두 좋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국민이 그저 좋은 선물에 마냥 흡족해하는 피동적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니라면, 헌법 개정 논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헌의 적기가 언제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언제 개헌을 하든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일종의 헌법 학습장이 되기도 할 거다. 국민 참여가 그저 이런 것도 넣어주세요, 이건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건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듯, 치열한 논의를 꾸준하게 해보자는 거다.

“국가는 진보적 규범에 입각하여 일체의 차별 없이, 모든 개인의 인권이 포기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으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모든 공권력 기관은 헌법과 공화국이 서명하고 승인한 인권조약과 관련 법률들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베네수엘라 헌법 제19조)

인권교과서에 그대로 옮겨도 좋을 만큼, 완벽한 조문이다. 1999년 우고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의 헌법 개정은 확실히 돋보였다. 350개조(한국은 130개조)의 헌법은 분량만이 아니라, 내용도 세계적이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헌법전을 들고 시위를 벌이던 그 나라 국민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선물이었다. 그 좋은 선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가 죽고 난 다음, 완전히 딴 나라가 되었다. 희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 되었다. 좋은 지도자에게 기댄 헌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베네수엘라가 잘 알려주고 있다.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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