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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학의 법률칼럼] 장 발장을 위한 벌금제도 (민주신문, 2017.12.18)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18 17:52
조회
881

장 발장,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 발표한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굶주린 누이와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 발장은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다. 하지만 미리엘 신부의 사랑과 도움으로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베풀며 새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칼을 내려놓게 하는 것은 자베르 경감의 엄격한 법집행이 아니라 따뜻한 온정과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는 장 발장의 이름을 딴 은행이 있다. 지난 2015년 한 인권단체에 의해 설립된 ‘장 발장 은행’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여느 은행과는 다른 일을 한다. 벌금형을 선고 받고 벌금을 납부하지 못해 감옥에 가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은행이다.


장 발장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감옥에 가는 대신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은행이다. 소설 속의 장 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신부와 같이 작지만 값진 사랑을 베풀고자 설립된 은행이다. 대출금은 개인 및 종교단체의 후원금으로 충당된다. 설립 이후 최근까지 534명에게 10억여 원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었다. 이들 중 272명이 대출금을 갚고 있고 지금까지 2억3500만원을 상환했다. 82명은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


장 발장 은행이 설립된 이유는 우리나라 벌금제도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벌금제도는 총액벌금제이다. 총액벌금제란 동일한 범죄행위에 대해 동일한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얼핏 공정할 것 같은 이 제도가 갖는 문제점은 형벌효과의 불평등을 낳는데 있다. 쉽게 말해 경한 범죄에 대해 선고되는 100만원의 벌금이 부자에게는 너무 가벼운 형벌인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매우 무거운 형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 맷값을 던져주고 사람을 폭행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던 재벌 3세에게 수백·수천만원의 벌금형이란 무죄방면에 다름이 없다.


반면 하루 종일 찬바람 속에서 일해야 7만원을 버는 서민에게 100만원의 벌금형은 매우 중한 형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총액벌금제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유독 가혹한 형벌이 되는 것이다. 총액벌금제 하에서도 납부기한을 연기 받거나 매월 조금씩 분납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당사자의 어려움은 훨씬 경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법 현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벌금형은 선고되면 30일 이내에 납부하여야 하고 미납시 노역장에 유치된다. 벌금의 연납•분납제도가 있기는 하나 검찰의 무관심으로 실제 허락대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때문에 벌금형을 선고 받고 납부하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되어 몸으로 때우고 있는 사람들이 매해 4만명이 넘는다.


벌금형 제도의 본래 취지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감옥생활의 고통을 면해주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계속해 나가도록 배려하는데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앞으로는 풀어주고 뒷문으로 마구 잡아들이는 상황이다. 내년 1월 7일부터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대해서는 집행유예의 선고가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실제 서민들이 혜택을 볼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총액벌금제가 갖는 형벌불평등의 효과를 피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일수벌금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일수벌금제란 범죄의 중한 정도 및 행위자의 책임의 크기에 따라 벌금일수를 정하고, 행위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하루벌금액을 정한 뒤 이를 곱하여 벌금액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폭행사건에 대해 벌금일수가 30일로 정해지고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하루벌금액이 10만원으로 정해지면 총 벌금액수가 300만원이 되는 방식이다.


만약 행위자가 극빈층이라면 하루 벌금액이 2만원으로 정해져 총 60만원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재벌 3세라면 하루 벌금액이 100만원으로 정해져 총 3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다. 실례로 2002년 핀란드에서는 차량과속으로 단속된 유명대기업 부회장에게 경제력을 고려하여 한화 약 1억 3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 예도 있다. 형벌의 효과, 형벌의 고통이 동등하게 부과되도록 하는데 이 제도의 장점이 있는 것이다. 경제력을 고려한 벌금액의 산정은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회적 약자의 수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피고인의 경제력을 정확하게 산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도입의 반대논거로 든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 국민들의 수입이 전산화되어 파악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이미 각종 세금이나 건강보험료가 개인 및 세대의 경제력 차이에 따라 차등 부과되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국회 및 사법기관의 관심이다.


매년 4만 명이 넘는 사회적 약자들이 감옥에서 몸으로 벌금을 때워야 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우리는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말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장 발장을 위한 벌금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국회 및 사법기관의 관심과 행동을 촉구한다.


서보학 suhbh@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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