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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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책’이 쉽게 출간되지 못하고, 출간 된다 해도 독자들을 만나기 힘든 상황입니다. ‘인권 책’이 단 한권이라도 더 출간되고, 단 한명의 독자라도 더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독자들이 보다 자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권책’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나눌 만한 책을 소개해주실 각계의 연구자, 선생님, 언론인을 모셨습니다.
‘인권-책 위원회’에는 강대중(서울대 교수), 김상미(너머북스 대표), 김종진(삼인출판사 편집장), 김진규(초등교사), 방효신(초등교사), 서유석(호원대 교수), 손하담(중등교사), 안혜초(중등교사), 은종복(서점 ‘풀무질’), 이광조(CBS 피디), 이제이(방송작가), 장의훈(중등교사), 정상용(초등교사), 주윤아(중등교사), 최보길(중등교사), 홍성수(숙명여대 교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역 - 김종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5:27
조회
1615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프리모 레비 글/ 이소영 옮김, 돌베개, 원제 : I Sommersi e i Salvati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
이보다 더 못 볼꼴을 볼 수 있겠는가 싶은 5년이 겨우 지나갈 무렵 또다시 시작된 5년. 그보다 더 못 볼꼴들을 보게 되겠다는 참담한 예견 앞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다.
혜안이 없는 시대, 눈먼 자들이 만들어낸 이 상황 앞에 자발적 청맹과니가 되는 것 외에 일상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 일은 일종의 사고로 보였다.
눈먼 자든 눈을 감은 자든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는 대형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 정확히 모를 배 한 척이 진도 앞바다, 미역 따는 주민들이 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땅에서 멀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서 멈춰 서더니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광경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었다. 몇몇은 발을 동동 굴렀던가. 몇몇은 기도를 했던가. 가슴을 치며 울었던가. 또 몇몇은 비분에 찬 주먹을 쥐고 악다구니를 쳤던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어야 했던가.’ ‘정녕 사고였던가, 아니면 사건이었던가.’
지극히 기본이 되는 질문을 하기 위해, 자식 잃은 아버지는 싸운다. 권력도 힘도 없이 걸 것이라곤 몸 하나뿐인 아버지가 제 몸 하나 던져놓고 싸우는 그 싸움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왜 이것이 싸워서 받아내야 하는 답인가’를 묻지 않는다.
몇몇은 같이 운다. 응원한다. 동참한다. 몇몇은 시시비비를 따진다. 몇몇은 냉소한다.
그리고 몇몇은 삿대질을 한다.
4월 16일 가라앉기 시작해 여전히 침몰 중인 그 배, 그리고 곳곳에 드러나는 흉폭한 사건들이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어느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폭력의 울타리 안에 살고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첫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시작으로 아우슈비츠를 증언하고 그 기억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프리모 레비는 이 책에서도 이미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에게서 목격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모 레비가 남긴 이 책을 통해 목도하게 되는 것은 가라앉은 배, 즉 폭력의 울타리가 아닌, 그 안에 속해 가라앉거나 구조된(죽거나 산) 몇몇들이다.
우리는 인간세계에 넘쳐나는 사건과 갈등들을 해석할 때, 인간을 두 부류, 즉 ‘우리-그들’ ‘친구-적’ ‘선인-악인’ ‘승자-패자’로 이분화하는 걸 선호한다. 그러한 단순화의 욕구로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를 읽고 쓰는 사람들은 수용소 내부의 인간관계도 박해자와 희생자라는 두 덩어리로 축소하곤 한다. 당시 라거에 도착한 사람들도 그러한 기대를 품는다. 끔찍하지만 해독 가능한 세계, 즉 내부의 ‘우리-피해자’와 외부의 ‘적-가해자’라는 선명한 경계로 나뉜 세계를 볼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입소 후 수용소에서 목격하게 되는 광경은 끔찍하기도 하면서 해독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라거에 갓 수용된 신입들을 맞이하는 건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연장자, 특권층 포로, 관리자 포로다. 이 관리자 포로는 손을 잡아주고 길을 가르쳐주고 안심시켜주는 한편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기도 한다. 새로 들어온 사람을 길들이고 자신은 이미 잃었지만 상대방 마음에는 남아 있을 법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존감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죽이 배급되는 동안 구타하는 배급관리자를 ‘감히’ 밀쳐 관리자 동료들에 의해 죽통에 처박혀 죽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같은 포로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권층의 폭력은 이들을 라거에 끌고 온 원래 적의 폭력보다 더 직접적이고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던 특수부대가 있다. 그들의 임무는 화장터의 운영이었다. 가스실에서 시체를 꺼내고 턱에서 금니를 뽑고 옷가지, 신발, 가방 등을 분류하며 시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고 재를 꺼내 없애는 일까지 희생자 자신에게 작업의 가장 추악한 부분을 대리하게 함으로써 하위 종족인 유대인, 인간 이하로 다뤄져야 할 유대인들이 모든 굴욕에 굴복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특수부대의 후보는 수용소에 도착하는 화물열차에서 선발되곤 했다. 거부하면 죽였고 수락하면 다른 수용자들보다 좀 덜 굶주리는 형편에서 몇 달 더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는다. 프리모 레비는 이를 두고 주인과 하인의 영역을 나누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라고 말한다. 주변 곳곳에 큰 힘을 가진 적이 있으면서 내부, 즉 우리 안에도 있는 상황, 더 나아가 내 안에조차 존재하는 상황, 그러한 세계에 속하게 되면 ‘우리’라는 말은 경계를 잃고 선과 악은 서로 타협하는 동지가 된다.
‘다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확실한 원칙은 아니었지만(인간사에서 확실한 원칙이란 없었고, 또 없다.) 그래도 원칙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97쪽)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회색지대가 비단 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권력층에 동조하고 협조하는 회색지대가 생겨난다. 오늘날에는 나치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악의 선봉장이 되어 직접 손에 피를 묻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대담무쌍한 권력층은 보기 어렵다.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다분히 교활한 수법으로 잠재적 희생자가 현재의 희생자를 핍박하고 처단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해낼 뿐이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폭력의 주체들은 개개인을 폭력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회색지대로 손쉽게 내모는 것이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피지배층에 속한 사람들끼리 주먹질을 하는 상황.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된 이러한 회색지대에서 ‘우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렵다. 권력의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고 항거하는 ‘우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리하여 권력은 어떤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게 되며, 더 나아가 자기 힘을 더욱더 부풀리고 유지할 수 있는 철옹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형국에서 희망이 있을까. 프리모 레비가 겪은 아우슈비츠에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편에 서야 할지의 경계는 고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흐릿한 그곳에서 프리모 레비가 발견한 건 ‘우리’에 앞선 ‘나’였다.
크고 작은 폭력의 직접적 희생자, 또는 그 폭력에 맞서다 자발적으로 가라앉지 않은 경우, (이 책에서 말하는) 구조된 자, 즉 살아남은 자로서 어떤 ‘나’가 될 것인지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어떤 ‘몇몇’에 속하게 될지가 정해진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아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이 본 것들을 말함(증언함)’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역할을 해냈다. 또 스스로 죽음의 시점을 선택함으로써-그 결정이 옳고 그름을 떠나-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죽기 1년 전 써낸 이 책을 통해 프리모 레비는 2014년 9월의 내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나를 바라보려면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넓혀 나를 둘러싼 환경,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울타리, 또 거기 속한 인간들의 면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내막을 살펴 바라봐야 할 것이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더럽고 참혹한 광경일수록 더욱더 뚫어지게 바라보라.
봐야 할 것을 보는 것에서 내가 나일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가 시작된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김종진/ 삼인출판사 편집장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
이보다 더 못 볼꼴을 볼 수 있겠는가 싶은 5년이 겨우 지나갈 무렵 또다시 시작된 5년. 그보다 더 못 볼꼴들을 보게 되겠다는 참담한 예견 앞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다.
혜안이 없는 시대, 눈먼 자들이 만들어낸 이 상황 앞에 자발적 청맹과니가 되는 것 외에 일상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 일은 일종의 사고로 보였다.
눈먼 자든 눈을 감은 자든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는 대형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 정확히 모를 배 한 척이 진도 앞바다, 미역 따는 주민들이 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땅에서 멀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서 멈춰 서더니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광경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었다. 몇몇은 발을 동동 굴렀던가. 몇몇은 기도를 했던가. 가슴을 치며 울었던가. 또 몇몇은 비분에 찬 주먹을 쥐고 악다구니를 쳤던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어야 했던가.’ ‘정녕 사고였던가, 아니면 사건이었던가.’
지극히 기본이 되는 질문을 하기 위해, 자식 잃은 아버지는 싸운다. 권력도 힘도 없이 걸 것이라곤 몸 하나뿐인 아버지가 제 몸 하나 던져놓고 싸우는 그 싸움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왜 이것이 싸워서 받아내야 하는 답인가’를 묻지 않는다.
몇몇은 같이 운다. 응원한다. 동참한다. 몇몇은 시시비비를 따진다. 몇몇은 냉소한다.
그리고 몇몇은 삿대질을 한다.
4월 16일 가라앉기 시작해 여전히 침몰 중인 그 배, 그리고 곳곳에 드러나는 흉폭한 사건들이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어느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폭력의 울타리 안에 살고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첫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시작으로 아우슈비츠를 증언하고 그 기억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프리모 레비는 이 책에서도 이미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에게서 목격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모 레비가 남긴 이 책을 통해 목도하게 되는 것은 가라앉은 배, 즉 폭력의 울타리가 아닌, 그 안에 속해 가라앉거나 구조된(죽거나 산) 몇몇들이다.
사진 출처 - yes24
우리는 인간세계에 넘쳐나는 사건과 갈등들을 해석할 때, 인간을 두 부류, 즉 ‘우리-그들’ ‘친구-적’ ‘선인-악인’ ‘승자-패자’로 이분화하는 걸 선호한다. 그러한 단순화의 욕구로 라거(강제수용소)의 역사를 읽고 쓰는 사람들은 수용소 내부의 인간관계도 박해자와 희생자라는 두 덩어리로 축소하곤 한다. 당시 라거에 도착한 사람들도 그러한 기대를 품는다. 끔찍하지만 해독 가능한 세계, 즉 내부의 ‘우리-피해자’와 외부의 ‘적-가해자’라는 선명한 경계로 나뉜 세계를 볼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입소 후 수용소에서 목격하게 되는 광경은 끔찍하기도 하면서 해독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라거에 갓 수용된 신입들을 맞이하는 건 불쾌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연장자, 특권층 포로, 관리자 포로다. 이 관리자 포로는 손을 잡아주고 길을 가르쳐주고 안심시켜주는 한편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기도 한다. 새로 들어온 사람을 길들이고 자신은 이미 잃었지만 상대방 마음에는 남아 있을 법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존감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죽이 배급되는 동안 구타하는 배급관리자를 ‘감히’ 밀쳐 관리자 동료들에 의해 죽통에 처박혀 죽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같은 포로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권층의 폭력은 이들을 라거에 끌고 온 원래 적의 폭력보다 더 직접적이고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던 특수부대가 있다. 그들의 임무는 화장터의 운영이었다. 가스실에서 시체를 꺼내고 턱에서 금니를 뽑고 옷가지, 신발, 가방 등을 분류하며 시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고 재를 꺼내 없애는 일까지 희생자 자신에게 작업의 가장 추악한 부분을 대리하게 함으로써 하위 종족인 유대인, 인간 이하로 다뤄져야 할 유대인들이 모든 굴욕에 굴복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특수부대의 후보는 수용소에 도착하는 화물열차에서 선발되곤 했다. 거부하면 죽였고 수락하면 다른 수용자들보다 좀 덜 굶주리는 형편에서 몇 달 더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는다. 프리모 레비는 이를 두고 주인과 하인의 영역을 나누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라고 말한다. 주변 곳곳에 큰 힘을 가진 적이 있으면서 내부, 즉 우리 안에도 있는 상황, 더 나아가 내 안에조차 존재하는 상황, 그러한 세계에 속하게 되면 ‘우리’라는 말은 경계를 잃고 선과 악은 서로 타협하는 동지가 된다.
‘다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확실한 원칙은 아니었지만(인간사에서 확실한 원칙이란 없었고, 또 없다.) 그래도 원칙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97쪽)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회색지대가 비단 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권력층에 동조하고 협조하는 회색지대가 생겨난다. 오늘날에는 나치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악의 선봉장이 되어 직접 손에 피를 묻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대담무쌍한 권력층은 보기 어렵다.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다분히 교활한 수법으로 잠재적 희생자가 현재의 희생자를 핍박하고 처단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해낼 뿐이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폭력의 주체들은 개개인을 폭력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회색지대로 손쉽게 내모는 것이다.
가장 낮은 데서 가장 힘겹게 살아가는 피지배층에 속한 사람들끼리 주먹질을 하는 상황.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된 이러한 회색지대에서 ‘우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렵다. 권력의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고 항거하는 ‘우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그리하여 권력은 어떤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대가를 치르지 않게 되며, 더 나아가 자기 힘을 더욱더 부풀리고 유지할 수 있는 철옹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형국에서 희망이 있을까. 프리모 레비가 겪은 아우슈비츠에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편에 서야 할지의 경계는 고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흐릿한 그곳에서 프리모 레비가 발견한 건 ‘우리’에 앞선 ‘나’였다.
크고 작은 폭력의 직접적 희생자, 또는 그 폭력에 맞서다 자발적으로 가라앉지 않은 경우, (이 책에서 말하는) 구조된 자, 즉 살아남은 자로서 어떤 ‘나’가 될 것인지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어떤 ‘몇몇’에 속하게 될지가 정해진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아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이 본 것들을 말함(증언함)’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역할을 해냈다. 또 스스로 죽음의 시점을 선택함으로써-그 결정이 옳고 그름을 떠나-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죽기 1년 전 써낸 이 책을 통해 프리모 레비는 2014년 9월의 내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나를 바라보려면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넓혀 나를 둘러싼 환경,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울타리, 또 거기 속한 인간들의 면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내막을 살펴 바라봐야 할 것이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더럽고 참혹한 광경일수록 더욱더 뚫어지게 바라보라.
봐야 할 것을 보는 것에서 내가 나일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