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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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집(HOUSE), 집(HOME)(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5-10 16:45
조회
666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출퇴근길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 한쪽으로 항아리 가게가 있고 앞으로는 고물상이 있다. 그 공터는 대형버스며 택시, 화물차들의 주차장이었다. 공터를 끼고 골목 맞은편에는 ‘시골백반’의 상호를 단 허름한 식당이 있다. 식당 아주머니 음식 솜씨는 모르지만 생명을 키워내는 솜씨만은 탁월했다. 겨울 지나 코끝에 따스한 바람이 묻어나기 시작할 즈음이면 공터를 둘러싼 울타리 아래로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고무다라 화분이 이십여 개가 넘었다. 삐죽삐죽 새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피고 지는 꽃들은 봄을 지나 여름이면 무성해졌고, 가을 넘어 겨울 문턱에 다다를 때까지 피고지곤 하였다. 아주머니의 취미생활은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한테 가지각색의 꽃을 보는 재미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주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어떻게 생명을 길러내는지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화분이 놓인 울타리에서는 진남보랏빛의 나팔꽃이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 때까지 마치 배경을 이루듯 피고 졌다.


2.
 고물상이 있는 도로가로는 오래된 벚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었다. 그늘진 곳에서 피는지라 늦게 핀 벚꽃은 색도 진하고 오래갔다. “이곳 벚꽃은 다른 곳보다 색이 진하구나~” 벚꽃 피는 무렵이면 일부러 꽃구경 나간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 먼저 들어선 고층 빌딩에 벚나무 서너 그루가 먼저 베였다.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지기를 바랐다. 그래도 대여섯 그루 남은 벚나무는 봄이면 꽃비를 날릴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여름이면 너른 가지를 펼쳐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었다. 고물상 주변을 환하게 밝히던 벚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둥치가 크고 우람하였다. 새벽녘으로 그곳을 지나다 보면 고물상 문 열기를 기다리며 밤새 폐지를 모아온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서는 고단한 얼굴마저 환해 보이곤 하였다.



사진 출처 - 경남신문


3.
 먼저 항아리 가게가 자리를 옮겨 이사를 갔다. 그래도 공터는 오랜 시간 주차장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고물상이 이사를 갔다. 그러고도 공터는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작년 여름, 식당 아주머니가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화분을 정리하던 아주머니 딸이 “우리 엄마 저 화분 치우고 우찌 사노~ 이제 어떡하냐! 어떡하냐?”며 친구한테 넋두리를 하였다. 그 말을 듣던 내 가슴 한쪽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서늘해졌다.
‘시골백반’ 식당은 그러고도 또 한동안 장사를 했다. 그리고 울타리 아래 있던 화분 몇 개가 아주머니 가게 앞으로 옮겨와 꽃을 피웠다.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 겨울 즈음에 ‘시골백반’ 식당은 문을 닫았다. 같은 건물에 있던 미용실이며 치킨 가게가 문을 닫은 지는 더 오래전이었다.


4.
 지난겨울 공터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담을 쳤다. 39층의 건물이 들어선다는 공지가 나붙었다. 울타리를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자취를 감췄고 공터를 밝히던 벚나무 대여섯 그루도 베어졌다. 봄이면 꽃비를 날리고,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며 도로를 환히 밝혀주던 벚나무는 이제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 40층이 넘는 건물 옆으로 또 다른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울컥, 가슴 한쪽이 또다시 서늘해진다.


5.
 어릴 때 세 살던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으로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으로는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아래로는 봉숭아며 맨드라미, 과꽃 들이 피고 졌다. 담벼락 아래로는 해바라기가 피어올랐다. 여름이면 엄마는 마루에 앉아 세 자매의 손에 봉숭아물을 들여 줬는데, 그때 손가락을 감싼 것은 커다란 피마자 잎이었다.
 우물이 있는 그 집엔 세 가구가 살았다. 안쪽으로 주인집과 그 옆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세 살았고, 대문 앞으로 우리가 살았다. 시골에 일이라도 생기면 엄마는 우리를 주인집 아줌마한테 맡겼다. 아줌마는 엄마가 없는 동안 우리를 먹이고 재워 주곤 하였다. 그런 우리 집 옆으로는 쪽문이 있는데 그 쪽문을 열고 나가면 공터가 있고, 주욱 달려나가면 논밭이 나왔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치운 눈이 공터에 산처럼 쌓였다. 동네 오빠들이 산처럼 쌓인 눈을 다져 굴을 만들었다. 그 굴속에서 노는 게 우리의 겨울 놀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볏짚 낟가리가 올라갔다. 숨바꼭질할 때면 숨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하루종일 뛰어놀다 해거름 녘이면 온통 볏짚을 옷에 묻힌 채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정월 보름에는 깡통에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붙여 휙휙 돌리는 쥐불놀이를 하던 곳도 그 논이었고, 한쪽에 물을 가둬 얼려 썰매를 타던 썰매장도 그 논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씀바귀와 냉이를 캐던 곳도 그 논밭이었다.


6.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부자도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산다.”
 벚나무 사라진 곳에서, 나 어릴 적 살던 집이 생각났다. 요즘이야 ‘대문, 마당, 우물, 장독대, 볏짚 낟가리, 쥐불놀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텐데, 그저 넋두리인 것을. 많은 사람이 꽃구경을 가고 단풍놀이를 가고 물놀이를 가는데, 예전에는 그냥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하던 놀이였다는 것을, 아니 그냥 삶이었다는 것을 고층 건물이 들어설 담 아래서 곱씹어 봤다.


 부동산 논란, 아니 광풍인지도 모를 이즈음에, 내가 사는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BEST HOME’, ‘元家’라고 표기된 빌라 한 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은 곧 정신이라고도 하고! 우리는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할 집을 그저 자산의 하나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비록 마당은 없더라도 집은 ‘HOUSE’가 아닌 ‘HOME’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집 이름. 내가 사는 집 이름이 그냥 아파트면 남한테 밀리니 캐슬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이마저도 촌스러운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집[HOME]이기를 바란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다고들 하는 이 시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