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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세상 바로잡기(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1-25 11:46
조회
882

이윤/ 경찰관


 검찰개혁 과제 중 하나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가 법 통과 이후 지지부진 하고 있다. 야당 반대로 공수처장 후보자 선정이 어려워진 모습을 보면서 로마의 파비우스가 한니발을 상대로 벌인 지연작전이 떠올랐다. 한니발이 공격하면 전투를 피해 도망가고, 그렇다고 완전히 철수하지도 않으면서 지긋지긋하게 거리를 두고 쫒아 다니는 것만으로 결국 카르타고 군을 지치게 만들어 로마를 지켰다. 공수처장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선정하려 하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계속 공수처가 독재정치의 수단이라는 주장을 언론에 발표하는 모습이 지연작전과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4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 없었던 일로 만들면 승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고위공직자의 부패를 예방 및 수사하기 위한 공수처는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 2004년경 대학원 과제로 홍콩의 염정공서,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 캐나다의 상설반부패청 등 여러 반부패기구를 조사하던 중에 이런 기구는 한국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설치의 조짐은 많이 있었으나 설치가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017년 문재인 대통령 공약에 포함된 것을 보고 ‘혹시 받아준다면 나도 공수처에 지원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이렇게 늦어지는 것을 보면 그 때 공수처 지원에 올인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뉴스만 쳐다보다가 말라죽을 뻔 했다. 지원한다고 해서 받아줄 지도 의문이지만.


 공수처의 역할은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인간세상에서 다시 양화가 대세가 되도록 악화를 솎아주는 것이다. 그레샴 선생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자신의 이론이 한국에서 이런 식의 비유로 사용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정의가 승리해야 하고,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순진한 내 마음에 부정적 세계관을 심어주었으니 이 정도는 감내하셔야겠다.



사진 출처 - YTN


 그레샴 법칙의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열심히 절도범, 강도, 살인범 잡으러 다닌 형사는 승진이 늦은데, 바쁘지 않은 자리 또는 바쁘더라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닌 사람이 쉽게 또 더 빨리 승진하게 되면 그 행동양식이 모델이 되어 경찰조직에는 점점 업무를 열심히 하려는 사람보다는 승진 요령만 터득한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청렴성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나에게 ‘술 마시고 운전하다 걸렸을 때 네 이름 대면 풀어주냐?’라는 시답지 않은 농담(진담일지도)을 건네는 친구가 있다. 그런 친구에게는 ‘그러면 괘씸죄로 더 크게 혼내주라고 할 거다’라고 역시 씁쓸한 농담으로(진담일지도) 대답한다. 경찰관도 음주운전 하면 징계 먹고 강제전출 당하는 등 처벌받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 사람들의 인식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것이 통했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라서 봐주고, 돈 받고 봐주고, 승진 등에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이 부탁하면 봐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악화다. 곧이곧대로 단속하여 딱지 끊고, 원칙대로 움주단속 하던 사람들은 양화다. 20년 전까지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인터넷, 스마트폰, CCTV처럼 진실을 감지·저장·재생하는 기술이 있어 악화가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그 덕분에 경찰에서는 양화가 다수가 되고 악화는 드물어졌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어서 언제라도 악화가 득세할 수 있다. 따라서 악화를 잡아낼 시스템(법과 제도)을 만드는 일은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그것을 게을리 하고 잘못이 드러난 사람만 쳐낸다면, 가을 논에 웃자란 피처럼 악화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몇 사람만 조직에서 축출한다고 해서 조직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보통은 희생양 한 두 사람만 쫒아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악화가 득세하는 곳에서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끼리 학연, 지연, 혈연, 룸연, 골연, 스폰서연으로 엮여 서로 불법과 탈법을 눈감아주고, 그렇게 해서 생긴 부정한 재산을 나누어먹고, 천대만대 세습도 할 것이다. 부의 논리 앞에 정의가 희미해지는 것을 막으려면 법과 제도로 이 나라 안 어떤 곳에서도 위법과 부당이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법과 원칙 앞에 예외와 성역은 없어야한다.


 공수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국가 시스템이다. 법률상 공수처가 기소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사인소추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재판과 처벌을 피해갈 수 있었다. 공수처가 생기면 그들만의 짬짬이는 힘들어진다. 동창이라고, 친척이라고, 스폰서라고 봐주려 할 경우 자신까지 처벌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빨리 설치되어 이 사회의 악화들을 몰아내면 좋겠다.


 이 시점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포에니 전쟁에서 지연작전을 펼친 로마가 결국 승리했으나 10년간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휘저으며 끼친 피해는 재앙급이었다는 것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국가 투명성은 필수다. 공수처 설치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한국 사회는 정체가 아닌 후퇴를 경험할 것이다. 지금 나의 순진한 가슴은 곧 다가올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로 콩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