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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예의바름의 역학 (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14 17:01
조회
1185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어쩌다 다행히도 저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분들과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기운 운동장도 합법이고 질서로 여겨야 하는 세상입니다. 여기서 애를 써가며 하루하루 살아내시고 인권연대에 후원을 하시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를테면 '읽거나 말하는' 분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적어도 자기에게 닥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하는 방법을 알거나, 타자에게 연대를 요청할 마이크가 주어진 셈이겠지요. 하다하다 안 되면 짱돌을 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요즘은 다이소에서 짱돌이 아니라 LED 촛불을 팔더라고요. 자본의 촉이란 이렇게 정교하고 무섭습니다.


 읽고 말하고 듣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지 10년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저는 '나도 자료를 읽고, 정책과 예산이나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내고, 내 말에 대한 반론의 요지를 듣고, 그에 대한 반박을 문서로 만들 줄 아는' 사람임을, 매번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합니다. 주로 외부에 나가서이지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각종 위원회 같은 곳에 참여할 기회가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회의에 가 보면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의지가 읽히기보다는, 적당히 균형 잡혀 보이는 논의구조를 구성하기 위해 시민사회라든가 여성이라든가 젊은이가 습관적인 악세사리가 된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늘 찬반을 공히 비슷한 비율로 구성해 진행되는 토론회처럼요.


 알고 갔지만 기대하는 바-이왕이면 가만히 있어줄 것-에 충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되든 안 되든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회의 전에 자료를 숙지하고,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방안 마련과 자료 제출 요구를 합니다. 수차례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 마디의 의견도 내지 않는 고령의 남성, 전문직 위원도 있지만 공직사회는 그분들에게 늘 깍듯하고 서로간의 예의를 주고받습니다. 그분들은 공무원들에게 문제제기를 해서 불편하게 하지도, 자료제출 요구를 해서 야근을 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문제제기가 필요할 때는 예의바르게 합니다. 웃으며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습니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으니, 저처럼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 많이 하고 요구도 많이 하는 저는 불편한 존재, 소위 ‘싸가지 없는 젊은 여자’로 여겨질 거라 예상해봅니다.


사진 출처 - Freephoto


 최저임금 개악안을 두고 투쟁이 한창입니다. 세월호 유족들도 여전히 싸우고 있고, 강정의 해군기지 앞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위해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는 방법을 택한 여성들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보다 그 영향에서 아슬하게 빗겨간 노동자가 더 많습니다. 세월호 유족이나 강정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합니다. 임금이나 사회적 위상은 아직 남성에게 더 많이 주어졌지요. 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소수이고 약자이고 관찰과 평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싸우면서 예의바르기란 힘든 일입니다. 좋게 말로 해도 될 일이었으면 애초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요. 예의와 매너를 갖춘 약자에게 강자는, 그만큼의 예의와 매너를 돌려주지 않습니다. 설득과 관철의 수단이 말과 글밖에 없는 약자들에게는 싸우는 과정에서 요구받는 예의가 마치 줄타기의 기술과 같습니다. 아슬하고 위태하게 균형 잡기 위해 잔뜩 긴장해봐야 겨우 중심잡고 서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의 매너와 예의는 다른 차원입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인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인기나 인지도 같은 상징자본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개의 경우 상징자본은 실제 자본으로 이어지기도 쉬워서, 이 글에서는 그냥 ‘가진 사람’으로 퉁치겠습니다. ‘가진 사람’은 예의바를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하고 웃으며 대해도, 화자의 의도대로 결과가 생깁니다. 싸울 필요가 많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가진 사람’이 뭔가 요구하기 전에 이미 다 갖춰진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가진 사람’일수록 더 예의와 매너를 갖춰야 한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깁니다. 이미 다 갖췄거나, 품을 덜 들여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자산에 대해 긴장해야 합니다. 세상에 당연히 주어지는 자산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산이 권력, 예컨대 선거에서의 득표와 같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득표는 권력이라는 유형의 자산을 만들어냈지만, 득표를 형성하는 지지는 엄밀히 말해 무형의 자산이고, 형태가 없기 때문에 잃기도 쉽습니다.


 지방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선증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아니, 당선증을 받기도 전에 공중파를 비롯한 방송에서조차 유권자를 대하는 태도가 유별났던 몇 정치인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하루하루 싸워내며 호소하고 항의하는 ‘무례한’ 민원인들 앞에서, 비슷한 강도의 비매너로 일관하던 숱한 의원님들도 떠올립니다. 당신들은 틀렸고, 더 예의바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의바를 마음이 없어도 연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예의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도 질서로 여겨야 하는 세상에서 이런 요구라도 하지 않으면 숨통 트고 살 도리가 없습니다.